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두고 한 외교 고문은 이렇게 말한다.
1944년 충북 음성에서 태어나 6.25를 겪은 반기문 사무총장은 어릴적부터 꿈이‘외교관’이었다.
초등학교때 변영태 당시 외무장관의 교내 강연을 듣고 외교관의 꿈을 가졌다. 꿈을 이루기 위해 영어공부에 몰두한 그는 고3때 웅변대회에 나가 입상한다. 그 부상으로 미국을 방문, 존 F케네디 대통령을 만난다. 그때 그는 자신의 꿈을 되새김질 한다.
2006년 10월 한국인 최초로 유엔 사무총장이 된 반 사무총장은 5년후인 2011년 6월 22일 국제사회의 전폭적인 지지속에 재선에 당당히 성공한다.
반 총장을 옆에서 봐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에 대해 ‘성실과 노력’이라고 입을 모은다.
반 총장은 “나는 탁월한 사람이 아니다. 내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어릴적 부터 ‘책벌레’, ’공부벌레’라는 말을 듣고 자랐던 반 총장은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0년 외시에 합격해 첫 임지인 인도에서 외교관에 입문했다.
그와 함께 일했던 상사들은 “반 총장과 함께 일하면 든든하다”며 신뢰를, 후배 외교관들은 “믿고 따를 만한 선배”라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 그는 미주국장, 외교정책실장,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외교부 차관으로 동기생 가운데 최선두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2001년 한.러 정상회담 합의문에 조지 부시 미 행정부가 폐기를 주장하는 탄도탄 요격미사일 제한 조약의 보존과 강화를 뜻하는 문장이 포함됐고, 그 책임을 지고 반 총장은 차관직에서 불명예 퇴진한다.
야인으로 지낸지 넉달 후 한승수 당시 외교부 장관이 유엔 총회 의장이 되면서 그는 의장 비서실장으로 발탁된다.
그때 반 총장은 유엔 무대의 실질적 움직임을 파악하는 기회를 얻게 되고 후일 사무총장이 된 뒤 당시의 경험이 비효율적인 유엔 조직을 개혁하는 밑거름이 됐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으로 재직할 때는 외교안보 노선을 놓고 치열한 논쟁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특유의 조정 화합 능력과 성실성을 인정받아 외교통상부 장관에 임명됐다.
물론 이번 재임 확정 과정중 지난 5년간 유엔 사무총장을 지내면서 중동 민주화 움직임 등에 나약한 모습을 보여왔다며 그의 능력을 절하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목소리 역시도 그의 성실함과 노력앞에서는 소리를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