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몽골에서 바라본 내몽골 사태

2011-06-12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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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몽골 한정탁 특파원) 지난 한 달간 삶의 터전을 훼손하는 석탄운송 차량에 항의하다 사망한 몽골족 청년 메르겐이 촉발한 몽골족의 시위로 '내몽골'에 대한 소식이 자주 뉴스에 올라오고 있다.

내몽골이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636년 청나라가 내몽골(남쪽 몽골이란 뜻도 있다) 지역을 실질적으로 점령하면서 부터다. 내몽골 지역은 한족(漢族)이 유입되면서 농업과 상업이 정착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비사막 이북의 외몽골(북쪽 몽골, 지금의 몽골) 지역은 1691년 청조가 자신의 강역으로 편입하였지만, 한족 이주는 정책적으로 금지했다.

20세기 초 청의 멸망을 틈타 내·외 몽골의 통합 움직임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을 감싸고 있던 북쪽의 러시아와 만주·내몽골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던 일본 사이의 갈등과 협정으로 인해 1921년 (외)몽골만이 독립적인 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몽골은 1924년 소련의 지원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 사회주의 정부를 꾸리고 러시아를 '큰형'으로 삼았다.

내몽골 지역은 중일전쟁과 만주국의 설립과 폐망, 국공내전 등을 겪은 뒤 1947년 중국 공산당의 지원으로 내몽골자치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이후 행정구역이 재편되면서 중화인민공화국 안에 내몽골자치구가 형성됐다. 1960년대 문화혁명과 중소갈등으로, 이전까지 신생 몽골인민공화국(외몽골)과 내몽골자치구의 원만했던 교류는 중단된다. 이후 1980년대 중반에 와서야 왕래가 재개됐다.

중국 국적의 내몽골인은 몽골어와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어 주로 중국 기업체 직원으로 몽골에 들어오거나 무역과 식당 등 자영업을 운영하고 있다. 억양과 어휘에 차이는 있지만 내몽골-외몽골 사이의 의사소통에는 어려운 점이 없다. 하지만 변화된 생활방식과 두 국가간 인식차로 이질화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이번 사건은 중국 영토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몽골 자체의 문제이기도 했다. 근래 광물개발 붐을 타고 '마인(광산)골리아(MINE-GOLIA)'라고 불리기도 하는 몽골. 하지만 현지 언론에서는 연일 석탄과 금광 개발로 파헤쳐 지는 땅과 주민 문제에 대한 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특히 대규모 석탄 채굴과 수출이 이뤄지는 내몽골 접경 지역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80t 대형트럭으로 인해 인명사고와 차량사고가 끊이질 않고 발생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중국과 한국 등 외국자본이 몽골을 사라지게 만들 것이라며 시민단체를 조직하고 시위를 벌이고 있기도 하다.

몽골은 지금 광물자원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중국은 내몽골을 새로운 자원의 보고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환경과 인권문제는 내·외 몽골이 공유하고 있는 또 다른 과제이기도 하다. 과거 몽골제국의 영광을 단지 '광물'과 '개발'이란 이름으로만 재현할지, 아니면 다른 국가들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어 새로운 모델을 만들지 현명한 판단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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