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52시간 근무제에 족쇄 차인 K-반도체
2024-12-26 09:06
반도체 특별법이 R&D(연구개발) 인력의 주 52시간 근무제 문제로 국회에 발목이 잡혀 있다. R&D 인력 중 희망자에 한해 한시적으로 주 52시간제를 완화해 달라고 해도 정치권에서는 요지부동이다. 심지어 삼성전자 고위 임원들이 반도체 특별법에 ‘주 52시간 예외’ 조항을 포함시켜 달라고 직접 국회를 찾아 호소했다는 이야기까지 들리지만 정치권은 제도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며 기업들의 요구에 냉담한 반응이다.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 취지는 ‘워라밸(work&life balanc)'에 있었다. 과도한 야근 문화 개선, 퇴근 후 취미활동 등 일상의 여유를 제공함으로써 직장인들에게 일과 삶의 질 조화 측면에서 매우 긍정적이다.
문제는 모든 산업과 직종에 이 제도가 획일적으로 적용된다는 점이다. 도입 초기부터 이러한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개선 요구가 있었고 당사자 간 합의를 통한 보완이 필요하다는 데 어느 정도 공감대가 있었다. 작년 3월 정부에서 개편안 검토가 있었고 범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합의점을 도출하기 위한 대화가 시작됐다.
하지만 2년여 시간이 지난 현재까지 전혀 진전이 없다. 이 같은 상황이 계속돼 급변하는 세계 경제 환경 속에서 수출주도형 경제구조를 가진 한국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다가올 미래는 매우 부정적이다.
삼성전자 같은 기업들이 ‘화이트칼라 이그젬프션’(주 52시간제 예외)을 주장하는 이유도 반도체 산업의 위기 원인 중 하나를 이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주 52시간제는 국내 반도체 산업의 생산성 저하 원인뿐 아니라 반도체 기술인재들이 원활한 협업과 업무 연속성을 유지하기 어렵게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근무시간을 딱딱 끊어서 계산하기 힘든 연구개발이나 서비스업종에까지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전근대적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조금 더 일을 하고 싶어도, 납기를 맞추고 싶어도 법이 허락하지 않는다.
R&D 역량이 곧 기술 경쟁력으로 직결되는 반도체 산업에서는 글로벌 경쟁사들은 장시간 집중적인 연구개발을 통해 기술적 우위를 확보해 왔다. 엔비디아·TSMC 등 글로벌 기업들이 R&D에 막대한 시간을 투입하는 동안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주 52시간 규제에 묶여 있어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화이트칼라 면제 조항은 반도체산업에 꼭 필요한 제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실제로 미국은 주당 최대 근로시간을 제한하지 않고 있다. 대신 일주일에 40시간 이상 일했을 때 추가 근로시간에 대해 정규 임금 대비 최소 1.5배를 받는 정책을 시행 중이다. 일본은 고소득 전문직을 노동시간 규제 대상에서 제외하는 ‘고도 프로페셔널’ 제도를 도입해 시행하고 있다.
경쟁자들이 밤새 반도체 연구개발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주 52시간 근무제'라는 족쇄에 묶여 있는 셈이다.
중국에 치이고, 혁신이 멈춘 채 유산에만 의존하던 제조업 모범생 독일 경제가 최근 완전히 무너지는 모습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미·중 통상마찰과 중국 기업들의 공습, 고환율·고유가 등 수출 주도형인 우리 경제에도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위기가 엄습하고 있다.
당리당략의 유불리를 따질 때가 아니라 한국 경제 미래를 위한 빠르고 현명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다. 치열한 글로벌 경쟁 속에서 한국 경제의 미래를 위해 정치권이 심사숙고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