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자본시장의 탐욕과 '포이즌필'

2024-11-26 21:43

국내 사모펀드(PEF)가 태동한 지 올해로 20년째다. PEF가 여러 굵직한 경영권 인수 거래에 뛰어들면서 국내 자본시장 키플레이어로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했지만 동시에 일반 주주가치 훼손, 적대적 인수합병(M&A) 등에 대한 우려도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 특히 해외자본 유입으로 인한 국가의 핵심기술 유출 등 기업만의 문제를 넘어 국가 안보와도 직결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때문에 국가와 기업, 일반 주주들의 피해가 더이상 이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포이즌필(Poison Pill; 신주인수선택권) 등 그동안 ‘뜨거운 감자’로 여겨져 온 제도들에 대한 논의를 더 이상 미뤄서는 안된다.

미국의 사례를 보면 포이즌필 도입의 필요성을 공감할 수 있다.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 시절 미국에서는 사모펀드와 기업사냥꾼들의 적대적 M&A가 횡행했다. 수많은 우량기업들은 해체되거나 매각되는 등 혼란을 겪었다. 이때 포이즌필이 등장해 탐욕으로 일그러진 자본시장의 분규를 종식시킬 수 있었다. 1982년 변호사인 마틴 립튼에 의해 고안된 포이즌필 전략은 적대적 인수자의 지분 확보를 어렵게 만들기 위해 주식의 희석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국내에서는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지난 2020년 9월 ‘차등의결권’과 함께 ‘포이즌필’을 도입하는 상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지만 민주당의 반대를 넘어서지 못했다. 앞서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에도 포이즌필을 허용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을 추진했지만 야당과 시민단체가 ‘재벌 특혜’라고 반대해 무산됐다.
 
최근에도 상법 개정을 통해 PEF의 적대적 M&A에 대한 안전장치를 마련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하지만 여야 강대강 대치가 악화하고 있는 국회 상황 때문에 제도화는 아직도 요원하다. 각각의 제도마다 시장의 이해관계가 첨예한 만큼 신중하고도 신속한 의견 수렴이 요구되지만 정치권 진영 논리에 논의 자체가 지지부진하다.
 
이렇다보니 우리나라는 국가 기간산업마저 투기자본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대표적인 예가 고려아연과 MBK·영풍의 경영권 싸움인데, 고려아연은 세계 1위 비철금속 기업이자 2차 전지 소재 등 첨단산업의 핵심기업이다. 중국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니켈 제련과 전구체 생산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글로벌 공급망 재편 시대의 전략적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정부가 고려아연의 2차 전지 전구체 제조 기술을 국가핵심기술로 지정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 경영권에 대한 안전장치가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단기 수익을 추구하는 PEF의 손아귀에 고려아연과 같은 기업이 언제든 넘어갈 수 있는 위험에 처해 있다.
 
PEF는 통상 3~5년 내 투자금 회수를 목표로 하는데, MBK의 투자자금 중 상당수가 해외자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기술유출과 해외매각 우려는 더욱 커진다.
 
미국은 반도체지원법·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EU는 핵심원자재법(CRMA)을 만들어 자국의 산업 보호에 적극 나서고 있다. 보호무역주의가 팽배한 글로벌 통상 환경에서 자국의 기술 보호 및 공급망 확보는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늦은 감은 있지만, 우리도 기업의 경영권 방어를 위한 장치 마련에 나서야 한다. 특히 국가의 핵심기술을 보유한 기업들에 대해서는 더욱 강화된 보호장치가 필요하다.

시장경제 원리를 훼손해서는 안되겠지만, 국가 기간산업 보호를 위한 정부의 전략적이고 제한적인 개입도 필요하다. 기술은 경제의 근간이고 나아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한다. 외국 자본에 기술이 넘어가는 것을 막음과 동시에 기업가치 제고에 집중할 수 있는 제도 마련에 머리를 모아야 할 때이다.
 
전운 산업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