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성어로 세상 읽기](29) 어질고 현명한 아내의 내조 - 계명지조(雞鳴之助)
2024-11-11 15:03
신생 제국 당나라 번영의 초석을 닦고 태평성세를 이룬 당태종 이세민은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불린다. '정관의 치(貞觀之治)'로 역사에 기록된 당태종의 치세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위징이다. 위징은 때마다 간언을 마다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모시는 주군을 바른길로 이끈 특급 도우미였다.
신하가 간언을 하지 않으면 나라가 위태롭고, 간언을 하면 자신이 위태롭다. 위징은 병이 들어 퇴임할 때까지 200번이 넘는 직언을 했다. 위징의 거듭되는 쓴소리에 속이 상한 당태종이 어느날 침전으로 돌아와 위징을 죽이겠다고 말했다. 황후가 연유를 묻자 "위징이 항상 나를 모욕하기 때문이오"라고 답했다. 그 얘기를 들은 황후가 잠시 물러나더니 예복 차림으로 되돌아와 "폐하께 경하드립니다"하며 절을 했다. 깜짝 놀란 당태종이 무슨 일이냐고 하니 황후가 이렇게 말했다. "임금이 밝으면 신하가 곧다 하였는데, 위징이 곧은 것을 보니 폐하의 밝음이 드러나는지라 어찌 경하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당태종은 낯이 뜨거워졌고 위징을 향한 분노는 봄눈 녹듯이 사라졌다.
지혜로운 이 황후가 중국 역사에서 가장 모범적인 황후로 꼽히는 장손황후다. 장손황후는 남편의 절친이자 정변의 동지인 친정오빠를 중용하지 말도록 간언할 만큼 역대 왕조의 두통거리인 외척의 발호를 경계했다. 당태종은 식견과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아내에게 종종 조언을 구했는데, 그때마다 장손황후는 현안과 유사한 역사적 사례를 언급하며 남편이 참고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기를 바랐을 뿐 국정에 개입하기를 삼갔다. 늘 겸손하고 검소했던 그녀는 지병으로 35세의 젊은 나이에 죽으면서도 장례를 간소하게 할 것과 충신들의 충언에 귀 기울이고 소인들의 아첨을 멀리하라는 당부를 남겼다. 정관의 치는 위징과 같은 명신들의 보필에 장손황후의 사려깊은 내조가 더해져서 가능했다.
육영수 여사를 3년 동안 수행한 김두영 전 청와대 비서관의 회고에 의하면, 육 여사는 약자들 민원을 들어주고 "이런 민심이 있다"고 전할 뿐, 정치는 "대통령 하실 일"이라며 한치도 개입하지 않았다. 사람을 쓸 때는 오랜 기간 됨됨이를 지켜본 뒤 썼기에 측근 논란도 전무했다. 사치와도 거리가 멀었다. 옷은 저렴한 국산 옷감을 손수 디자인해서 가까운 양장점에 맡겨 만들어 입었고, 입던 옷을 손봐 외국 특사로 가는 딸 예복으로 쓰게 했다. 경리 장부에는 수입과 지출, 잔고가 원 단위까지 촘촘히 기록되어 있다. 애초에 국정개입은커녕 특활비나 명품백 논란 따위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는 삶이었다. 영부인에게 이런 마음가짐이 없다면 제2부속실 10개 만들어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게 김 비서관의 결론이다.
중국 최초의 시가(詩歌)집 시경(詩經)에는 춘추시대 여러 나라 민간에서 구전되던 노래 가사 305수가 실려 있다. 그중
닭울음 소리를 매개로 아내의 내조를 노래한 작품 두 수가 있으니 바로 '계명(雞鳴)'과 '여왈계명(女曰雞鳴)'이다. 먼저 '계명'을 보자. 새벽 첫닭이 울자 아내가 남편을 깨운다. 어서 일어나 일 나가라고. 예나 지금이나 아침 일찍 일어나 일터로 나가는 건 괴로운 일이다. 단잠을 더 자고 싶어 꾸물대는 남편을 아내가 조곤조곤 설득한다. 그런가 하면 '여왈계명'에서는 아내가 첫닭이 울었다고 하면서 남편을 깨우자 남편이 순순히 일어나 사냥을 해오겠다고 하고 아내는 그걸로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주겠다고 화답한다. 지혜로운 아내가 빚어내는 정감어린 부부의 모습들이다. 내조의 마음가짐이 되어 있지 않다면 아내라고 첫닭이 우는 소리가 귀에 쏙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다. '어질고 현명한 아내의 내조'라는 의미의 성어 '계명지조(雞鳴之助)'가 여기에서 유래했다. 시대와 나라는 달랐어도 장손황후와 육영수 여사는 공통점이 많다. 겸손과 절제된 처신, 지혜로운 내조를 통해 최고권력자 남편을 도운 장손황후와 육영수 여사는 계명지조의 표본이라 하겠다.
대선 전부터 허위 이력과 7시간 녹취록으로 물의를 일으킨 김건희 여사는 “조용히 성찰하며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고 한 약속과 달리 명품백 수수 논란에 인사 개입, 공천 개입 의혹을 일으키는 부적절한 처신과 행보를 이어갔다. 민심이 떠나고 지지율이 썰물처럼 빠졌다. 결국 윤 대통령이 여론에 떠밀려 지난 7일 대국민 담화 및 기자회견을 가졌으나 사과는 두루뭉술했고 아내 감싸기는 여전했다. '총론 사과, 각론 변명'은 사과의 진정성을 떨어뜨린다. 윤 대통령은 김 여사의 국정 관여 의혹을 '조언'이라 정의하고 이를 육영수 여사의 '청와대 야당' 노릇에 비유했다. 얼마나 많은 국민이 공감할지 궁금하다.
군주제나 공화정이나 권력의 속성은 크게 다르지 않다. 권력자의 눈과 귀를 잡아당기는 힘은 거리에 반비례한다. 누구보다도 지근거리에 있는 권력자의 아내는 소위 '베갯머리 송사'도 가능하다. 그렇기에 늘 스스로 삼가고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 그럼에도 김건희 여사는 남편의 정치 입문 초기부터 '내가 권력을 잡으면 어찌어찌하겠다'느니, '남북문제에 역할을 하겠다'느니 하는 발언으로 권력의 사유화와 국정개입에 대한 우려를 자아냈다. 우려는 현실이 되었고 민심은 김건희 여사의 전면적 활동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뜸들이던 제2부속실 설치를 서두르고 있다는 대통령의 다짐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다.
일국의 퍼스트레이디가 활동 중단을 요구받는다는 건 심히 민망한 일이다. 허나 누구를 탓하랴. 몰카 촬영과 통화 녹음이 일상화된 시대에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지 않은 업보요 자업자득인 것을. "그럴 거면 들키지나 말던가." 대통령 부부가 3류 기자에게, 친북 사이비 목사에게, 듣보잡 정치브로커에게 꼬리를 잡혀 휘둘리고 모욕당하는 모습에 잔뜩 화가 난 국민들이 혀를 차며 하는 말이다.
유재혁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제일기획 근무(1985~2008) △'한국산문' 등단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