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성어로 세상 읽기](26) 급히 먹는 밥이 체한다 - 발묘조장(拔苗助長)

2024-09-30 14:29

[유재혁 칼럼니스트]
 

춘추전국시대 약소국이었던 송나라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았나 보다. '어리석음'과 관련된 성어를 다수 남겼으니 말이다. 헛된 명분을 좇다가 이길 수 있는 전쟁에서 패한 어리석은 행위를 일컫는 '송양지인(宋襄之仁)', 일을 급히 서두르다 오히려 그르치는 '발묘조장(拔苗助長)', 요행만을 바라거나 융통성이 없음을 이르는 '수주대토(守柱待兔)' 등이 죄다 송나라 사람들이 남긴 성어들이다. 본고 26회차에서는 '발묘조장'이란 성어를 통해서 세상의 어리석음을 읽어보려 한다.

송나라의 한 농부가 모내기를 한 후 매일 논에 나가봤지만 벼가 생각만큼 잘 자라지 않았다. 괜시리 초조해 하던 어느날, 딴에는 기발한 생각이라 쾌재를 부르고는 갓 나온 벼의 싹을 일일이 조금씩 위로 잡아당겼다. 녹초가 된 농부가 집에 돌아가서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오늘 힘들었지만 헛수고 한 건 아니야. 벼가 많이 자랐거든" 농부의 아들이 그 말을 듣고 이튿날 논으로 달려가 보니 새싹들이 모두 말라 죽어 있었다. 성어 발묘조장의 유래가 된 이야기로《맹자ㆍ공손추上》에 나온다. 

발묘조장은 줄여서 '조장'이라고도 하는데, 조장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을 더 심해지도록 부추기는 선동, 부채질 등의 의미로 자리잡았다. 벼를 빨리 자라게 하려고 어린 싹을 위로 잡아당기는 어이없는 행동은 성과를 빨리 거두려는 조급증의 발로다. 살다 보면 서둘러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서둘러 한 일의 결과는 대개 좋지 않다. 윤석열 정부의 의료개혁이 그래서 불안하다.

지난 2월 정부는 의료개혁의 기치를 호기롭게 들어올렸다. 하지만 의사들은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에 강력 반발했고, 그 중심에 선 1만 명에 가까운 전공의들은 병원을 떠났다. 그렇게 의료대란이 시작되었다. 의료개혁의 본질도 아닌 의대 증원이  도화선 역할을 한 셈이다. 의정 갈등은 일곱 달째 이어지면서 민심의 풍향도 바뀌고 있다. 당초 의대 증원 계획은 90%에 가까운 여론의 지지를 받았으나 지금은 국민의 과반이 정부가 의료개혁을 잘못하고 있다는 쪽으로 여론이 돌아섰다.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은 20%선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고, 직무 수행 부정평가의 가장 큰 요인이 '의대 정원 확대'다. 대체 어찌된 연유일까?

지난 수십 년간 역대 어느 정부도 의료개혁에 섣불리 손을 대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가 2020년 의대 400명 증원을 시도했지만 이내 의사들에게 백기를 들었다. 박근혜 정부도 2013년 비대면 진료 도입을 꾀했으나 집단 휴진을 강행한 의협의 반발로 역시 실패했다. 정부가 의료 정책을 관철했던 사례는 2000년 의약 분업이 유일하다. 그마저도 당시 김대중 정부가 의사들에게 수가 대폭 인상과 의대 정원 10% 감축이라는 큼직한 당근을 던져주고서야 어렵사리 의약 분업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의사 부족의 씨앗이 그렇게 뿌려졌다. 그만큼 의사들의 '내 밥그릇 지키기'는 철옹성이다. 의료 현장을 지키는 의사들 신상을 공개한 블랙리스트 사태나 언론을 통해 전달되는 막말에서 보듯 인성의 바닥을 보여주는 의사들도 많다. 집단이기주의가 팽배한 직군을 상대로 혁명보다 어렵다는 개혁을 하려면 주도면밀한 사전 준비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도 결과를 장담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호기롭게 의료개혁에 나선 윤석열 정부는 어떠했는가? 매년 2000명 증원에 대한 논리가 치밀하게 세워졌는가? 의사들에 대한 설득 노력은 충분했는가? 빤히 예견된 의사들의 반발과 저항을 무력화할 정교한 로드맵과 액션플랜이 있었는가? 혹여 별다른 준비도 없이 의사 증원에 호의적인 여론에 힘입어 떨어진 국정 지지율 회복과 총선 간접 지원을 노리고 서둘러 일을 벌인 건 아닌가? 급히 밥 먹다가 체한 꼴이 돼버린 정부의 궁색한 처지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정부의 의대 증원 정책 발표는 조급했고 계획은 엉성했다. 의료계와의 사전 소통도, 국민들을 향한 사후 설명도 미흡했다. 
덜컥 발표하고는 수습하기 바쁜 모양새가 국가 R&D 예산 삭감 정책 때와 판박이다. 정부는 지금도 왜 매년 2000명씩 5년 동안 1만명의 의사를 늘려야 하는지 의사들은 물론이고 의사 증원을 찬성하는 국민들조차 납득시키지 못하고 있다. 툭 숫자를 던져놓고 힘으로 밀어붙이는 식이어서는 반발을 초래할 뿐이다. 

정부와 의료계의 강대강 대치 속에 2025년도 입학 정원은 1497명으로 조정되었고 2026년도 정원 재논의 가능성도 열렸으나 의정 갈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우려했던 추석 응급실 대란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국민들이 겪는 불편과 불안은 여전하다. 송나라 농부야 한 해 자기 농사를 망치는데 그쳤지만, 윤석열 정부의 거칠고 서툰 정책 추진에 애꿎은 국민이 가슴 졸이며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우여곡절 끝에 만찬 회동을 했다. 늘 그렇듯 대통령이 발언을 거의 독점했다고 한다. “대통령 혼자 체코 원전 이야기만 했고, 말 그대로 밥만 먹는 자리였다”는 국힘 내부의 불만이 만찬의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독대를 통해 민심을 전하고 시급한 정국 현안을 논의하려 한 한동훈 대표는 인사말조차 할 기회가 없었다. 언론은 즉각 '빈손 회동', '맹탕 만찬'이라고 비판했다. 여권 공멸의 위기감은 날로 커지는데 대통령은 민심이 얼마나 무서운지 여전히 모르는 것 같다. 공자가 말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최상급이고, 배워서 아는 사람이 그 다음이고, 곤경에 처해 배우는 사람이 또 그 다음이며, 곤경에 처해도 배우지 않는 사람이 최하등급이다."

이 글 작성을 마칠 즈음인 29일 저녁 정부가 '의료인력 수급 추계기구'를 신설하기로 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향후 의료 인력 수급 결정에 의료계 입장이 대폭 반영될 것이라고 한다. 만시지탄이라 하겠으나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다. 모쪼록 정부와 의료계가 이제부터라도 마음의 문을 열고 만나 국민을 안심시키는 결과를 이끌어내기를 바란다.





유재혁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제일기획 근무(1985~2008) △'한국산문' 등단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