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브린의 For Another Perspective] 시위대는 텐트를 접고 도로를 시민에게 돌려주라
최근 서울 도심의 세종로를 운전하던 중 토요일마다 대로를 점령하는 시위대에 발이 묶였다. 그날 나는 1980년대 한국에서 외신기자로 활동하던 두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들은 근처 호텔에 묵고 있었다. 시내 호텔은 손님들에게 시위에 대해 안내하기 때문에 그들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이 활동하던 시절에는 데모란 민주주의 이름으로 깨진 보도 블록과 화염병을 폭동 진압 경찰에게 던지고 "아직 모이지 않은 군중"들의 이름으로 최루탄 속에서 정권과 싸우는 진지한 학생들을 의미했다. 시간이 흘러 데모의 주역이었던 엘리트 대학 민주주의 산파들이 이제 60대가 되었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 더욱 이해하기 힘든 것이 있다. 이들은 부모들이 가족보다는 직장이나 일에 집중해 자신들은 방치되었다는 정서를 지닌 다음 세대로 부터 민주주의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기는커녕 오히려 널리 무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데모 스타일도 변했다. 소규모 그룹으로 거리로 나오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들고 있는 플래카드가 의사를 전달하게 만들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낸다. 더 큰 규모의 시위를 보면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려올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품격이 있는 모습이다.
도로를 점령하며 이들이 시위에 나서는 구체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듣고 있던 팟캐스트에 더 관심이 있었고 시위대 보다는 도로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이들에 대해 필자는 남대문 주위 다른 정기 집회에 반대하는 보수적 기독교 단체와 연관이 있다는 정도만 밝히겠다. 한 그룹은 대통령 탄핵에 찬성하고 다른 그룹은 반대한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면 입장이 서로 바뀐다.
시위자들은 야외 교회 예배에 참석한 듯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한국, 미국, 심지어 이스라엘 국기까지 들고 있었다. 그건 좋은 신호였다. 적어도 그들이 민주주의를 지지한다는 의미로 해석힐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21년) 1월 6일 (트럼프 지지자들의) 미 의회 난입때 화제가 된 뿔 달린 모피 모자를 쓴 무당과 같은 특이한 복장을 한 남자가 밴 위에 서서 소리를 지르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이는 그렇게 좋은 신호는 아니라고 여겨진다.
내가 더 게으른 사람이라면 이들을 극우라고 부르겠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요즘 민주주의 스펙트럼에 대한 입장을 설명하는 데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작가의 편견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제한된 지식과 짜증이라는 출발점에서 정치적 견해를 갖게 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독자들은 이러한 정신적 패턴에 익숙할 수 있다. 특히 투표 전에는 이를 삼가는 것이 좋다. 하지만 짜증을 감정적 기원에서 분리시키면 타당성을 가질 수 있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은 이것이다 - 도대체 교인들이 정치에 대해 길거리에서 외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나는 즉흥적인 어떤 추정에도 넘어가지 않는다. 이 사람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된 이후로 계속 해왔다. 이러한 노력에는 조직과 예산도 필요다. 교회가 뒤에 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서?
이 질문을 하면서 나는 교인들이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사회의 모든 분야에 참여할 수 있고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가 신도들을 모아 거리로 나서게 할 때, 신도들이 항상 같은 방식으로 투표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사회가 붕괴되는 것과 같은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거나 또는 목사들이 자신을 홍보하기 위해 문제를 이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해서, 오늘 날 시위에 참석하는 교인들의 존재가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반윤 시위자들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비록 필자는 하찮은 이유로 탄핵을 요구하는 것이 반민주적 반역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 이유는 교회가 자신의 적절한 역할을 넘어서는 명백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사회를 조직하는 데 권력을 사용한다. 민주주의에서는 보통 목적과 윤리를 놓고 정치적 견해 차이가 벌어진다. 즉, 어떤 정책이 효과적인 해결책이며 공정하고 좋은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종교의 역할은 다르다. 종교는 내면의 자아를 치유하여 정치를 포함한 삶에 건전한 방식으로 접근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역할은 매우 중요한데, 이는 영혼이 투표보다 더 중요하며 정치가 그것을 치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지금까지 우리가 가진 최선의 체제이지만 그 체제가 아무리 좋아도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자기 중심적이고 유권자에 대해 무관심하다면 부패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리더의 위치에 훌륭한 사람들이 있길 원하는 것이다. 사회가 불교 사회라면 훌륭하고 도덕적인 불교도가 집권하기를 원할 것이다. 기독교라면 훌륭한 도덕적 기독교인을 원할 것이다.
이는 사회의 다른 분야에도 적용된다. 예를 들어 교사를 생각해 보자. 교사의 직업은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이다. 하지만 5년 동안 매주 주말마다 두 학교의 교사들이 우리 시의 주요 도로 6차선을 정기적인 정치 시위로 점거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누가 그들에게 자녀를 교육을 맡기고 싶겠는가?
게다가 교회는 해야 할 다른 일이 많다. 우리는 삶의 목적에 대한 심각한 위기에 놓인 사회에 살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과 네 번째로 높은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다. 아니면 남성들이 가정 폭력에 대해 회개하고 훌륭한 남편과 아버지가 되기로 서약하도록 격려하는 운동을 교회가 주도하면 어떨까?
교회들이 기독교인 개인으로서 각자의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하도록 격려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교회는 시위를 종료하고 도로를 시민들에게 돌려줘 한다.
(번역 황민하 인턴)
[필자 약력]
마이클 브린은 현재 글로벌 PR 컨설팅 회사인 인사이트 커뮤니케이션스 CEO다. '가디언'과 '더 타임스' 한국 주재 특파원, 북한 기업에 자문을 제공하는 컨설턴트, 주한 외신기자클럽 대표를 역임했다. 가장 최근에 출간한 <한국인을 말한다>를 포함해 한국 관련 저서 네 권을 집필했다. 1982년 처음 한국에 왔으며 서울에서 40년 가까이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