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승연의 타임캡슐] "다시 한국에 전쟁이 나도 공산군과 싸우겠다"
2024-05-30 06:00
해외 6.25 참전용사들
소년 참전용사 빌 스콧
빌이 군에 입대하자마자 바로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졌다. 루이지애나에서 6개월 동안 기본 훈련을 마치고 일본 북해도로 파병되었다. 한국전에 투입되기 위한 강도 높은 훈련이 이어졌다. 1951년 12월, 얼음처럼 차가운 칼바람이 뼛속 깊이 파고드는 한겨울에 한국전 파병 명령이 떨어졌다. 먼저 투입된 사단은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었고 사기가 완전히 땅에 떨어진 상태에서 교체되었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빌은 철원평야와 백마고지 등의 치열한 전투에 투입되었다. 남들은 고등학교 다니고 있을 나이에, 평생 들어보지 못한 나라로 와서 전쟁의 잔혹함을 경험한다.
사람들은 스콧씨에게 물었다. 어린 나이에, 전장에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어떤 기분이었는지, 가족이나 고향 생각은 나지 않는지. 그의 대답은 한결같다. “아무것도 생각할 틈이 없다. 전투에서는 오로지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과, 옆에서 싸우는 전우들의 목숨을 지켜야 한다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백마고지 전투에 참전했던 스콧씨는 중공군들이 아이들을 먼저 앞세워 밀고 들어온 상황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아이들 나이가 열댓이나 되었을까. 스콧씨는 겨울 추위와 전쟁, 중공군과의 전투 외에 다른 전쟁까지 치러야 했다. 전쟁고아들을 보는 일이었다. 부모 잃은 고아들은 매일 짐승 같이 울부짖다 쓰러져 잠들고 잠들다 배고프면 또 울며 부모를 찾았다. 총알이 날아다니고 매서운 추위가 살을 에는 가운데 추위와 배고픔에 울부짖는 고아들을 보살피는 것이 스콧씨가 한국전에 파병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스콧씨는 자신과 사단 소속 동료 전우들 월급 일부를 걷어 고아원을 만들었다. 그리곤 수녀들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수녀들에게 맡겨진 그 고아원은 간판이 바뀌고 세월이 흘렀어도 오랫동안 유지되었다고 한다.
스콧씨가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나이는 19세였다. 한국에서 돌아온 스콧씨와 친구들은 모두 고등학교로 복학했다. 이후 스콧씨는 대학에 진학했고 대학에서 비로소 왜 한국전쟁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었다. 스콧씨는 수십 년이 지난 후 한국의 발전상에 대해 들었을 때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한국의 번영에 스콧씨와 그의 친구들도 한몫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스콧씨는 인터넷에 나온 사진 한 장을 지니고 다녔다. 휴전선 남쪽은 환하게 밝혀져 있고 휴전선 북쪽은 어둠에 덮인 한반도 위성사진이다. 그는 이 사진을 훈장처럼 지니고 다닌다. 6·25 참전으로 자유대한민국이 지켜졌다는 자부심은 그의 평생의 자랑거리다.
그와 함께 6·25에 참전했던 친구들 대부분은 지금 세상을 등졌다. 그는 몇 남지 않은 6·25 참전용사들과 한국참전용사회(Korean War Veteran Association) 지부를 만들어 한 달에 한 번 모임을 갖는다. 참전용사들은 매월 두 번째 화요일을 기다린다. 그들에게 한국전 기억은 너무나 강렬해서 잊을 수가 없었다. 한 달에 한 번 모여 옛 얘기를 나누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스콧씨가 만든 미국 버지니아 셰넌도어 밸리(Virginia Shenandoha Valley)의 KWVA 챕터 313은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6·25 참전용사 모임이 되었다. 노쇠하고 점점 기력을 잃다가 치매까지 앓게 된 스콧씨는 다른 기억은 잃어도 한국전 참상만은 또렷하게 기억했다. 스콧씨의 마지막 바람은, 발전된 한국을 꼭 한번 방문해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그는 2023년 3월 26일 운명했다.
눈물 많은 허버트 테일러
튀르키예 상이군인 용사
튀르키예에서 만난 한 노인은 6·25 참전 상의 용사였다. 1951년 1월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다리를 잃은 후 자신의 삶을 원망하고 살았다. 한국은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 한국인이라 하면 머리에 이가 득실득실한 사람들로만 생각되었다. 희망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 도대체 이런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 피를 흘려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것이 참전 당시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런 심정이었기에 한국전에서 전사한 동료들의 죽음은 개죽음이었으며 자신의 부상은 무가치한 것으로 생각했다. 귀국 후 한국 소식은 거의 없었고 간혹 뉴스가 나오면 온통 혼란과 정치적 탄압 소식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런 나라를 위해 다리를 잃은 자신이 한심스러울 따름이었다.
이 노병의 생각을 바꿔 놓은, 아니 인생을 바꿔 놓은 사건이 발생했다. 88 서울올림픽이었다. TV를 통해 비친 한국의 모습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정말 저곳이 내가 갔던 한국이란 말인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언론 조작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이를 계기로 한국에 대한 소식을 다시 찾았다. 한국의 발전은 어느새 뉴스가 아닌 생활을 통해 와닿기 시작했다. 삼성전자 제품과 현대자동차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때부터 인생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자신의 삶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고, 자신의 다리는 바로 저런 번영을 일궈내기 위한 밑거름이었다고 생각했다. 불행한 과거가 아니라 값진 희생이었다고 믿게 되었다.
노인은 울음을 터뜨렸다. “정말 고맙습니다. 당신들이 잘살게 되어서. 만약 당신들이 그때처럼 계속 굶주림 속에 있었다면 나는 나의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 남의 나라 내전에 끼어들어 내 다리만 잃었나 하고 삶을 원망했었는데 이제는 나는 비록 작은 헌신이었으나 수천만 명이 자유와 번영을 누리고 살 수 있도록 기여를 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기에 친구 이름이
한미연합회 (America-Korea United Society) 김영길 총회장은 2022년 한미연합회(AKUS) 한국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을 방문했다. 그는 한국의 발전상을 보고 싶어 하는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열 명을 AKUS 한국대회에 초청했다. 그중 두 명이 수속 도중 건강이 나빠져 한국행을 포기했고 여덟 명만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이 얼마나 변했는가에 대해 감탄한 얘기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들의 기억이 남아있는 용산 전쟁기념관 방문 스토리는 감동적이다. 전쟁기념관에는 전사한 미군들의 이름이 새겨진 벽이 있다. 한 참전용사가 6·25 때 전사한 친구를 찾아야 한다며 살피기 시작했다. 한참을 찾더니 그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그가 여기 있다!“ 노병의 팔을 뻗어 손끝이 닿을 만한 높이에 그가 찾던 친구의 이름이 새겨 있었다. 그는 죽은 전우를 찾았다며 새겨진 친구의 이름을 쓰다듬고 반복해 이름을 부르면서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 동행했던 이들도 모두 소리 내어 울었다.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라 일컫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vlesse Oblige), 그들이 가진 자유의 가치를 생면부지의 우리와 나누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의문이 생긴다. 대한민국은 무엇을 가졌으며 우리는 이를 지키기 위해 무엇을 나눌 것인가?
한국전쟁 3년 동안 미군은 3만6516명이 전사하고 8177명 실종되었으며 10만3284명이 부상당하고 7140명이 포로가 되었다. 총 15만5200명이 희생을 당했는데 이 숫자는 국군 희생자 64만5000명의 27%나 된다. 놀랄만한 것은 미국 장성의 자녀 142명이 참전했고 이들 가운데 35명이 전사했다.
황승연 필자 주요 이력
▷독일 자르브뤼켄 대학교 사회학 박사 ▷전 경희대 ㈜데이콤 공동 정보사회연구소장 ▷전 한반도 정보화추진본부 지역정보화기획단장 ▷경희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굿소사이어티 조사연구소 대표 ▷상속세제 개혁포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