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철 칼럼] '빠른 추격자' vs '시장 선도자' … 경계가 무너진다

2024-01-11 16:41

[김상철 글로벌비지니스연구센터 원장]



21세기 글로벌 시장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빠르게 무너지고 있는 시장의 경계다. 지난 세기는 선진국이 성장을 주도했지만, 금세기 들어서는 주도 세력이 신흥국으로 바뀌면서 산업생산과 소비를 리드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글로벌 공급망에 참여하고 있는 주자들의 면모도 선진국 일색에서 신흥국의 새 얼굴들이 대거 시장에 선을 보인다. 중국이 크게 부상하였고, 최근에는 인도와 동남아에 이어 중남미나 중동, 그리고 아프리카까지 꿈틀거린다. 이른바 인도·태평양 혹은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라는 세계 경제의 신(新)조어까지 등장한다. 우리도 이 틈바구니에서 줄타기하면서 끊임없이 대두되는 도전 앞에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응전을 전개 중이다.
 
이 과정에서 놓치지 말아야 대목이 있다. 글로벌 공급망이 확대 내지 재편되는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즉 신흥국이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서 채택하는 전략적 수단인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와 선진국이 신흥국 후발 주자를 따돌리기 위해 채택하고 있는 ‘시장 선도자(First Mover)’ 전략이다. 한국이 일본을 따라잡기 위해, 중국이 한국을 따라잡기 위해 전자의 전략을 구사했다. 반면 일본이나 구미 각국 주자들은 후자의 전략으로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백방의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지만 역부족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시장에서 일본이 한국에 따라잡히고, 한국이 중국에 따라잡히는 현상이 더는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일상화되고 있고, 이를 부인할 방법이 없다.
 
빠른 추격자들이 여전히 많기는 하지만 시장에서는 상대를 제압하는 우월적 선도자가 되기 위한 물밑 경쟁이 냉혹하다. 물고 물리는 이 총성 없는 전쟁에 한국의 주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추격자 전략만으로는 시장에서 버티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위협적인 중국의 주자들이 턱밑까지 쫓아오면서 갈수록 설 자리가 위태해지는 판이다. 1등이 아니면 시장에서 살아남기 힘들 정도로 승자독식의 시장 구도가 되고 있다. 그만큼 미래 먹거리 선점을 위한 춘추전국시대가 되면서 선진국이나 신흥국 구분 없이 다양한 주자들이 즐비하다. 누구든지 단번에 우월적 고지에 오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는 셈이다. 모든 분야에서 선두가 될 수 없으면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는 것은 필연적인 선택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새해 벽두에 미국의 라스베이거스에서는 세계 최대 기술 박람회인 ‘CES(Consumer Electronics Show, 1.9~12)’가 열리고 있다. 소비자 가전은 무늬일 뿐이고 미래 먹거리 경쟁 각축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빠른 추격자든, 시장 선도자든 지구촌 대부분 주자의 시선에 여기로 쏠린다. 올해 화두는 모든 사물(기기)에 연결되는 AI 빅뱅이다. AI가 우리 일상에 성큼 다가오고 있음을 예고한다. 코로나19 이후 최대 규모로 개최되면서 글로벌 경제의 회복을 위한 몸부림이 요동을 친다. 그래서인지 미래를 논하려면 연초에 반드시 라스베이거스를 다녀와야 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현장에 가보면 우리 주자들이 이 경연장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고, 경쟁자들이 우리를 따라잡기 위해 어떤 발버둥을 치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실감할 수 있다.
 
그래도 이만큼 먹고사는 것은 간판 대기업이 있기 때문, 있을 때 잘해야

올해 CES는 과거 어느 때보다 뜨겁다. 전체 출품업체 수가 4000개를 넘어섰고, 특히 미국·한국·중국 기업의 경쟁 양상이 예사롭지 않다. 미국(1148개사)과 중국(1104개사)에 이어 한국에서 772개사가 참가하여 역대 최대 규모이다. 일본이나 유럽 기업과 비교해 압도적으로 많다. 출품 기업 중 주최 측이 수여하는 ‘CES 혁신상’을 받은 기업도 143개에 달해 이 또한 최대 숫자다. 터줏대감인 삼성과 LG는 2000년대 중반부터 일본 가전 기업의 아성을 뿌리치고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장소에 위치한다. 옆에 있는 중국의 TCL과 하이센스가 호시탐탐 자리를 엿보고 있지만 아직은 힘에 부치는 모습이다. 하지만 언젠가 중국 기업에 그 자리를 내줄 수도 있다는 불안감과 초조감은 여전히 상수다.
 
우월적 선도자가 되기 위한 중국 기업의 날갯짓이 지칠 줄을 모른다. 이번에도 주변을 깜짝 놀라게 하고 있다. 가격 우위만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고 품질에서도 일취월장한다. 가전제품에서 AI와 디스플레이를 접목한 기술을 선보여 간담을 서늘케 한다. 모빌리티 부문에서도 큰 업체는 아니지만 샤오펑(小鵬)의 자회사 에어로HT가 플라잉카를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일본 기업의 반격도 만만찮다. 가전에서 한국에 밀리자 이를 접고 소니가 혼다와 손잡고 전기차를 들고나온 것을 비롯해 파나소닉은 모빌리티와 가전에 주력하고 있는 것이 두드러진다. 사업 다각화로 세계 시장에서 존재감을 되찾으면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코를 베일 수도 있는 살얼음판의 연속이다.
 
이처럼 해외에서 인정을 받고, 살벌한 경제 구도에서 우리 대기업은 우월적 위치를 확보하면서 위용을 과시한다. 대기업이 건재해야 중소기업이나 스타트업이 기를 펴면서 당당해질 수 있고, 성장의 사다리가 만들어진다. 유럽의 강소국들이 1〜2개 간판 글로벌 기업으로 먹고사는 것을 보더라도 개별 국가 차원에서 대기업의 존재는 큰 자산이자 경쟁력의 원천이다. 하지만 국내 사정을 보면 대기업을 바라보는 눈총이 따갑다. 정치권은 이들의 행태를 억압하지 못해 안달인 듯하다. 밖에 나가보면 국내에서 떵떵거리는 정치인이나 정부 인사들은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그저 그런 평범한 미물에 불과하다. 기업은 다르다. 기술이 있고, 경쟁력이 있으면 엄청난 대우를 받는다. 오늘 우리가 이만큼 사는 것도 굴지의 기업과 기업가 정신 덕이다.



김상철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경제대학원 국제경제학 석사 △Business School Netherlands 경영학 박사 △KOTRA(1983~2014년) 베이징·도쿄·LA 무역관장 △동서울대 중국비즈니스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