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걸프 진출, 새로운 50년의 첫 장을 열다

2023-11-06 06:00
인남식 국립외교원 전략지역연구부장

인남식 국립외교원 전략지역연구부장. [사진=외교부]
50년 전 한국은 무척 가난했다. 전쟁의 상흔은 여전했고 경제는 열악했다. 국민은 하루하루 삶을 버티며 치열하게 살아내고 있었다. 외화가 절실했던 그 시절에 청년들은 해외로 나가기 시작했다. 광부와 간호사들이 독일로, 건설 역군들은 생소하고 열악한 환경의 중동 땅을 밟기 시작했다. 1973년 12월 삼환기업이 사우디아라비아 서북부 카이바와 알울라를 잇는 164㎞ 도로를 건설하면서부터다. 이후 우리 건설기업의 중동 진출은 봇물 터지듯 확장되었다. 한국 경제 도약에 한몫을 감당한 중동 진출사의 한 장을 연 시기였다.

뜨거운 볕을 마다하지 않고 내 아버지 세대는 광야에서 길을 놓았다. 다른 나라 기업들은 폭염을 피해 낮에 쉴 때 우리 기업은 밤낮 가리지 않고 일했다. 그때 쉴 새 없이 흘러내리던 땀과 턱턱 막히던 가쁜 호흡이 모여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중동 어딘가 길, 항만, 건물 곳곳에 1970년대 한국 젊은이들의 행적이 새겨져 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한국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국제사회에서 인정받는 책임 있는 중추국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우리 스스로도 별것 아닌 듯 말하곤 하지만 원조를 받던 나라가 원조를 하는 나라로 바뀐 유일한 나라라는 사실은 엄청난 일이다. 아무것도 없던 땅에 중화학공업 단지가 들어서고, 철강과 자동차, 그리고 반도체와 IT 산업의 중심지로 탈바꿈했다.

사우디를 필두로 걸프 국가들은 한국을 궁금해하고 있다. 전쟁의 폐허, 극도의 가난, 북의 안보 위협이라는 녹록지 않은 환경에 굴하지 않고 도약해 온 힘을 알고 싶었다. 자신들 역시 불모의 사막에 마천루가 즐비한 왕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석유 덕이었다. 반면 한국은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것처럼 보였다. 석유의 시대가 곧 막을 내리고 탈탄소 시대로 가게 되는 이 즈음에 걸프 왕국들이 한국의 발전 경로에 눈길을 두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금번 사우디·카타르와의 정상외교는 50년의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였다. 에너지, 건설, 과학 기술 등 기존보다 심화된 경제 협력을 다짐하는 전기임이 분명했다. 성과도 작지 않았다. 그러나 경제 협력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전방위적 공동체 관계’로 나아가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석유 시대 이후를 대비하며 걸프 산유국들과 함께 미래 투자에 머리를 맞대기로 했다. 사우디와 진행한 수소 오아시스 협력 구상은 물론 카타르와 태양광, 스마트팜, 디지털 협력을 논의하는 등 다가올 미래 앞에 함께 선 것이다. 

도전 요인도 없지 않다. 전운이 감도는 불안한 정정(政情)은 투자와 인프라 건설에 걸림돌일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이 통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 한반도와 걸프 지역에 드리운 안보 위협은 서로를 이해하는 접점이기 때문이다. 함께 평화를 논하며 인식의 공감대를 넓히는 일이 중요하다. 동시에 국토 방어를 위한 구체적 방산 협력의 토대도 함께 쌓을 수 있다.

1973년 우리 청년들은 몸 하나 이끌고 아라비아에 길을 놓으러 뛰어들었다. 2023년 오늘은 첨단 기술과 넘치는 아이디어, 뛰어난 경영 감각, 그리고 미래 비전을 갖고 걸프 국가들과 만나고 있다. 50년 전 중동에 흘렸던 땀은 한국이 빈곤을 넘어서서 경제 발전을 이루는 토대를 만들었다. 이번 리야드와 도하의 정상외교가 다음 50년 대한민국을 한 단계 더 위로 도약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