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테크리포트] 'AI 혁명, 주도자' 노리는 손정의…작전명은 '프로젝트R'

2023-10-17 05:00
비전펀드 2년간 투자실패 24조 적자
손 회장 "반성"…알리바바 지분 매각 등
올해 그랩·쿠팡 주가 회복으로 흑자전환
투자 대신 인수 운영으로 사업전략 바꿔
생성AI 기업 인수·합병 합자회사가 목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사진=로이터·연합뉴스]

정보기술(IT) 스타트업 투자 실패로 최근 2년간 부진을 겪었던 손정의(손 마사요시) 소프트뱅크 회장이 ARM의 나스닥 입성 등에 힘입어 재기의 날갯짓을 하고 있다. 과거에는 ‘비전펀드’를 통해 유망 스타트업 발굴에 집중했다면 앞으로는 인공지능(AI) 기업을 인수·합병하며, ‘AI 혁명의 주도자’가 되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16일 IT업계에 따르면 최근 미국 IT 전문매체 디인포메이션은 손 회장이 소프트뱅크 자회사 비전펀드 대신 '프로젝트R'이라는 비밀 사업을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프로젝트R은 비전펀드와 별개로 유망 AI 스타트업을 발굴해 인수하거나, 주요 생성 AI 기업과 합자회사를 만드는 게 목표다. 

과거 손 회장과 비전펀드는 유망 IT 스타트업에 대규모 투자를 한 뒤 회사가 상장하면 차익을 펀드 출자자와 소프트뱅크에 돌려주는 형태로 사업을 전개했다. 알리바바 투자 성공에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기업·기관의 비전펀드 참여를 독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위워크·우버·소파이·IRL 등 잇단 투자 실패로 인해 비전펀드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소프트뱅크마저 2년 연속 대규모 적자를 기록하면서 사업 지속 가능성에 의구심을 갖는 시선이 늘어났다. 

지난 5월 소프트뱅크에 따르면 회사는 2022년 회계연도(2022년 4월~2023년 3월)에 9701억엔(약 8조7900억원) 적자를 기록했다. 2021년 회계연도에 1조7080억엔(약 15조4800억원)에 달하는 대규모 적자를 낸 데 이은 2년 연속 적자 행진이다. 소프트뱅크그룹이 2년 연속 적자를 낸 것은 2003~2004년 회계연도 이후 18년 만이다. 

일본 내 통신 사업으로 안정적인 캐시카우를 보유한 소프트뱅크가 대규모 적자를 기록한 이유는 비전펀드가 투자한 IT 기업들이 잇달아 적자를 내면서 평가 가치가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비전펀드는 지난해 5조3223억엔(약 48조2500억원)의 투자 손실을 냈다. 

손 회장도 지난해 8월 소프트뱅크 주주총회에서 일본 에도 막부의 초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우거지상 자화상을 언급하며 방만한 투자 포트폴리오에 대해 "반성한다"는 메시지를 냈다. 이에야스가 다케다 신겐과 전투에서 패배한 후 부하들을 시켜 초라한 자화상을 그리고, 그것을 보면서 끝없이 자기반성을 한 것처럼 본인도 절치부심하겠다는 의미다.

결국 소프트뱅크는 지난 4월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클라우드 기업인 알리바바의 지분 대부분을 매각해 5조엔(약 45조3300억원) 규모의 일회성 이익을 얻음으로써 적자 폭을 줄여야만 했다. 야후에 이은 손 회장의 두 번째 투자 포트폴리오이자, 가장 성공한 투자였다고 평가받은 알리바바와 관계를 끝낸 것이다. 

다만 올해 2분기에는 IT 기술주 강세로 인해 비전펀드가 1598억엔(약 1조4500억원)의 투자이익을 기록, 6분기 만에 흑자 전환에 성공하면서 한숨 돌리기도 했다. 비전펀드가 집중 투자한 쿠팡·그랩 등의 주가가 회복된 것이 주효했다. 
 
[사진=아주경제DB]
이런 상황에서 손 회장이 투자 대신 인수·운영으로 사업 방향을 바꾼 것이다. 프로젝트R은 AI 기반 서비스·자율주행·로봇 개발사를 설립하거나 인수하는 게 목표다. 지난 9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소프트뱅크가 10억 달러(약 1조3500억원)를 투자해 오픈AI와 조인트벤처(합작회사)를 설립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는데, 이 역시 프로젝트R의 일환일 가능성이 크다.

소프트뱅크·오픈AI 조인트벤처의 목표는 챗GPT 등 생성AI에 특화한 스마트기기를 만드는 것이다. 스마트폰·태블릿PC 등과 별개 기기로, 애플 디자인 총괄 부사장이었던 조너선 아이브가 프로젝트에 참여할 것으로 알려졌다.

손 회장은 지난 6월 소프트뱅크 주주들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챗GPT와 매일 소통한다"고 밝히는 등 생성 AI에 많은 관심이 있다고 밝혀왔다.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와도 매일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전했다.

이달 초 도쿄에서 열린 강연에서 참석해서는 "인간 지능을 넘어 넓은 산업 분야에 활용할 수 있는 '일반 인공지능(AGI)'이 10년 내에 실현될 것"이라며 "소프트뱅크를 전 세계에서 AI를 가장 많이 활용하는 기업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AGI는 인류 지혜 총계의 10배에 달하는 잠재력이 있다"며 "물류·제약·금융 등 모든 산업에 혁신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견했다.

소프트뱅크 AI 사업의 핵심은 지난 2016년 인수한 영국 반도체 설계업체(IP 팹리스) ARM이다. 손 회장은 ARM의 모바일 반도체를 기존 스마트폰·태블릿PC에서 AI용으로 확대하겠다고 비전을 제시하기도 했다. 

과거에는 ARM을 삼성전자·엔비디아 등에 매각해 인수 차익을 얻으려 했지만, 앞으로는 그룹의 핵심 사업으로 지속해서 육성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9월 14일 상장 후 한때 주당 63.59달러(약 8만6000원)까지 치솟았던 ARM 주가는 지난 13일 기준 주당 50.78달러(약 6만8000원) 선에서 횡보하고 있다.

업계에선 ARM이 단기적으론 생성 AI 열풍에 많은 수혜를 입을 것으로 본다. 생성 AI 학습·추론(실행)에는 엔비디아 등의 AI 반도체(GPU)가 필수이지만, AI 반도체에 작업을 지시하기 위한 중앙처리장치(CPU) 수요도 함께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대개 인텔·AMD 등 CPU 설계업체가 관련 수혜를 입고 있지만, AI에 특화한 기능을 추가한 ARM CPU를 사용하는 사례도 함께 늘어나고 있다.

실제로 AI 반도체 업계 1위인 엔비디아는 현재 널리 쓰이는 AI 반도체 'H100' 후속 모델인 'H200'과 'B100'을 내년 중 출시할 것을 알리면서, AI 반도체와 ARM CPU를 결합한 'GH200'과 'GB100'을 함께 선보이겠다고 밝혔다. CPU가 AI 반도체에 작업 명령을 전달할 역할만 하면 되기 때문에 비싼 인텔·AMD CPU 대신 ARM으로도 충분하다는 게 엔비디아 측 설명이다. 미국·영국 정부의 독점 우려로 무산됐지만, 과거 엔비디아가 소프트뱅크에서 ARM을 사들이려 했던 이유도 이러한 통합 AI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것에 있었다.

다만 장기적으론 ARM도 자체 AI 반도체를 개발할 필요성이 있다는 게 업계 전문가들 예측이다. 손 회장은 현재 ARM이 보유한 GPU 설계 자산(IP)인 '말리'를 활용해 자체 AI 반도체 개발에 나설 것으로 풀이된다. 이렇게 완성한 AI 반도체를 다른 IT 기업에 공개함으로써 엔비디아·애플·퀄컴 등과 경쟁할 것으로 보인다.

손 회장은 네이버와 합작 사업인 라인과 간편결제 영역에도 생성 AI를 적극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정보 요약을 통한 직원들 업무 효율화와 고객 응대 서비스 강화가 목표다.

다만 손 회장은 무분별한 AI 활용을 경계하며, 안전한 AI 사용을 위한 사회적 규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자동차에 여러 규제가 있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며 "편리하지만 위험한 자동차를 규제하는 것처럼 용도에 따라 핵폭탄보다 위험한 AI도 규제함으로써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