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을 위한 사법은 없다 下] 발달장애 피고인, 변호사 없이 재판…법원 출석통보도 서류로 '끝'

2023-07-27 18:02
재판절차·법률용어 난해… 방어권 제약
장애인 형사재판은 변호사 선임이 필수
점자·수어통역 등 판결서 제공 법안 발의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무고한 지적장애인이 범죄자로 누명을 썼던 ‘삼례 나라슈퍼 강도 사건’과 ‘수원역 노숙소녀 살해사건’이 발생한 지 각각 24년과 16년이 흘렀다. 사법당국은 지난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발달장애인들에게 '조사실'과 '법정'은 여전히 차별과 오심의 위험이 도사리는 곳이다. 발달장애인 등에 대한 법무·사법행정은 수사부터 재판까지 아직도 국제 수준에 미달한 상태에 머물고 있다. 장애인이 배제된 사법정책 현황을 짚고 대안을 모색한다. <편집자 주>

#A씨는 지하철역 출구로 이동하는 교각에서 휴대폰 1대와 현금 25만원이 담긴 가방을 발견하고 이를 그대로 들고 가 점유이탈물횡령죄로 기소됐다. 지적장애 정도가 심했던 A씨는 필수적으로 변호인이 선임된 상태에서 형사재판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1심 법원은 변호인이 선임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재판을 진행하고 A씨에 대해 3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B씨는 지난 2018년 전남 순천시의 한 주택에 들어가 5만5000원 상당의 속옷을 훔쳐 절도와 주거침입죄로 기소됐다. B씨 사건 역시 변호인 선임 없이 재판이 진행됐고, 1심 법원은 B씨에 대해 징역 8월과 2년의 집행유예를 선고하고 보호관찰을 명령했다. 출석요구서가 송달됐음에도 이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재판이 진행된 탓이다. 출석요구서와 판결문 등 각종 서류 송달에서 발달장애인에 대한 사법행정은 이처럼 여전히 소극적이다.
 
민·형사재판 등 각종 소송에서 발달장애인이 당사자가 되는 경우가 점차 늘고 있다. 그럼에도 발달장애인 10명 중 1명은 필수적인 변호인 선임 없이 형사재판을 받는 것이 현실이다. 부실하고 위법한 재판은 지적장애인에 대한 유죄 예단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재판 절차나 법률 용어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는 발달장애인이 다수임에도, 송달부터 판결 선고까지 각종 절차가 여전히 행정편의적으로 이뤄진다는 지적도 적잖다. 전문가들은 국제기준을 충족할 수 있는 수준의 방어권 보장과 발달장애인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재판 절차가 보장되어야 할 때라고 입을 모은다.
 
지적장애인 피고인 10명 중 1명은 변호사 없이 재판
27일 법조계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지적장애인 피고인 10명 중 1명은 변호인 선임 없이 형사재판을 받았음에도 법원은 여전히 별다른 대안을 내놓지 못한 상황이다.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이 지난해 말 내놓은 연구에 따르면, 2019년부터 2021년까지 형사재판(1심)을 받은 지적장애인 피고인의 6.8%는 변호인이 없이 재판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나머지 82.3%는 국선 변호인, 10.9%는 사선 변호인을 선임해 재판에 임했다.

형사소송법과 헌법은 심신장애가 있는 피고인의 형사 사건을 ‘필요적 변호사건’으로 보고 있다. 필요적 변호사건은 변호사 없이 개정할 수 없는 사건을 뜻한다. 심신장애가 있는 피고인의 경우, 형사재판에서 변호인 선임이 반드시 이뤄져야 하는데도 실상은 이와 동떨어져 있다는 조사결과가 나온 것이다. 형사소송법 33조 등은 ‘피고인이 장애가 있을 때 변호인을 선정해야 하고 변호인이 없으면 법원은 직권으로 국선변호인을 선정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최정규 원곡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원래 장애인이 피고인인 형사재판은 필요적 국선 사건으로 명백히 규정돼 있다”면서 “법원 단계에서 필요적 국선 선정이 이뤄지지 않고 변호사 선임이 누락된 채 재판이 진행된 경우가 적잖게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고 지적했다. 조미연 변호사(공익인권법재단 공감)도 “국선 변호인 의무 선정은 당사자에게는 마땅한 권리이고, 법문의 명시적 규정임에도 실무상 빈틈이 생긴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면서 “장애를 고려한 사법 절차 지원이 여전히 부족한 상황이라고 보인다”고 분석했다.
 
김지영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법원이 관련 관련 규칙을 제정해 지적장애인이 피고인인 경우 국선변호인을 선임하지 않고는 절차가 진행되지 않도록 하고, 위반 시 제재조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서를 통해 지적했다.
 
국선변호인의 발달장애인 형사재판 역시 부실하게 진행된다는 지적이 지속적으로 나온다. 한 형사 전문 변호사는 “지적장애인에 대한 형사재판의 경우 형량이 일반 재판보다 비교적으로 다소 가볍게 선고되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지적장애인들에 대한 소송을 맡은 국선 변호인들은 시간을 들여 무죄 여부를 다투기보다 유죄임을 인정하고 가벼운 양형을 받는 데에만 주력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출석부터 판결 선고까지 절차 난해...‘쉬운 판결문’ 도입돼야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출석통보와 증거 조사, 의견 개진, 판결 선고 등 재판 전 절차에서 발달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사법행정도 큰 문제로 꼽히고 있다. 수사기관이 통지사항이나 처분을 전화 등 구두로 설명하는 데 반해, 법원의 경우 단순히 서류 송달로만 절차 통보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여러 변호사의 지적이다. 글을 읽거나 읽어도 법률 용어를 이해할 수 없는 발달장애인들에게는 최소한의 방어권을 주장하기도 힘든 환경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재판 절차에서 발달장애인이 권리를 제대로 행사할 수 있도록 재판 절차 안내서나 '쉬운 판결문’을 국내에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다. 지난해 9월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는 국내 장애인의 ‘사법 접근’이 여전히 제한적이라고 지적하고, 읽기 쉬운 형태의 기록 등 보완 가능한 의사소통을 마련하라고 권고한 바 있다.
 
국회와 법원 역시 발달장애인을 위한 쉬운 판결문 도입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이원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3월 재판 당사자가 장애인이나 미성년자, 노인일 경우 점자자료, 수어 또는 문자통역 등의 방식으로 판결서를 제공하도록 하는 내용의 형사·민사소송법 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다.
 
법원도 지난해 12월 국내 사법사상 최초로 그림과 기초적인 어휘로 구성된 ‘쉬운 판결문’을 선보였다. 서울행정법원은 원고인 청각장애인이 서울 강동구청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알기 쉬운 용어로 판결문을 써 달라는 요청은 장애인의 ‘당연한 권리’”라고 밝히고 “판결문의 엄밀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를 작성했다”고 밝힌 바 있다.
 
조 변호사는 “쉬운 판결문의 도입은 의미가 크지만, 특정 부분에서만 이런 개선이 이뤄져야 하는 게 아니라 조사와 출석, 의견 개진, 판결 선고 등 사법 절차 전반에서 유기적이고, 종합적인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