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무자가 재산은닉해도 '깜깜이' 조사만...'재산명시 제도' 실효성 논란

2023-02-02 13:56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지난해 대여금 반환 청구 소송에서 승소한 A씨는 채무자에 대한 강제집행을 위해 관할 지방법원에 재산명시 명령을 신청했다. 집행이 어려운 상대 채무자의 은닉 재산 등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A씨는 채무자의 폐문 부재(문이 잠겨있고 사람이 없음)와 주소 변경을 이유로 법원에서 수차례 보정 명령을 받고 두 번의 재송달 과정을 거쳐야 했다. 5개월 후 열린 재산명시기일에서도 채무자의 비협조로 제출받은 재산 목록이 부실, A씨는 결국 법원에 재산목록 보완명령을 다시 신청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 사정 악화로 민사분쟁이 늘면서, 재산명시 제도를 통해 채권자가 채무자 재산에 대한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고 신속하게 집행을 해야 할 필요성이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사설 신용정보회사보다 훨씬 긴 소요기간, 부실한 재산목록, 내용에 대한 진실성 확인 방법의 부재로, 제도의 실효성에 대한 회의적 의견도 커지고 있다. 채무자 협력이 필요 없는 재산정보 조사제도도입 등이 대안으로 거론된다. 

2일 법조계에 따르면 현행 민사집행법상 재산명시 제도의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재산명시는 채무자가 재산을 은닉하거나 변제를 회피할 시 법원의 명령으로 채무자가 자신의 재산상황을 공개하게 하는 제도다. 일반적인 채권·채무나 도산 이후 채무 및 재산 청산은 물론, 강제이혼 이후 재산 분배, 양육비 지급 등 가사 관련 분쟁에서도 재산명시 활용도가 높아지는 추세다.
 
그러나 정작 현행 재산명시 제도의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변호사업계는 재산명시의 복잡한 절차 때문에 과도한 기간이 소요된다는 점을 주로 지적한다. 재산명시신청에 소요되는 기간은 수개월에서 길게는 6개월 이상이다.
 
이 같은 업계의 불만은 사법정책연구원의 지적과도 궤를 같이한다. 연구원이 2021년 기준 수도권 3개 법원의 재산명시 신청일부터 명시 선서까지 걸리는 평균 소요기간을 분석한 결과, 재산명시신청의 평균 소요기간은 약 155일. 소송에서 이긴 채권자가 채무자 재산을 파악하는 데에만 약 반년의 시간을 써야 하는 셈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부 변호사들은 재산명시 절차보다 몇 배 빠른 신용정보회사 활용을 추천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제출된 재산 목록이 부실한 경우가 상당수라는 점도 제도 활성화의 걸림돌이다. 제출 재산목록에 대한 진실성을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현행법상 재산목록에 대한 별도의 검증 방법이나 절차는 마련돼 있지 않다. 법관과 법원공무원이 제출목록에 대한 진실성을 검증할 의무 역시 없다.
 
이은성 변호사(법률사무소 미래로)는 “승소한 채권자 입장에서 도산 외 일반 채무에 대해서도 재산 명시를 신청하는 사례는 상당히 많다. 그러나 재산목록에 대한 허위 기재 시 형사처벌 또는 감치 등 처분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채무자가 제출한 재산목록에 대한 수정이나 이를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제한적이라 실효성이 상당히 떨어진다는 것이 변호사업계의 중론”이라고 진단했다.

김의택 변호사(법무법인 성지 파트너스)도 “현재의 재산 명시제도는 사실상 형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상대방 채무자가 이의를 제기하고 그 사이에 재산을 숨기거나 매각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면서 “국가기관에서 일괄적으로 승소한 채권자에 한해 채무자 재산을 조회할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는 지적은 실무에서도 지속 제기돼 왔다”고 말했다.
 
재산명시 위반 기소 비율도 0.22% ...법원 직권 재산정보조사제도 필요

재산명시를 회피하는 채권자에 대한 강제 수단은 감치 제도와 민사집행법 위반에 따른 형사처벌이 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사실상 제재 수단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많지 않아 실효성을 담보하기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다. 사법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최근 5년간(2017년~2021년) 경찰이 접수한 법원의 감치집행명령은 연간 평균 3만4327건이었지만, 연간 평균 집행건수는 2150건으로 평균이 6.4%에 그쳤다.
 
형사처벌로 이어지는 비율도 극히 낮았다. 아주경제가 사법정책연구원의 보고를 분석한 결과, 2016년부터 2020년까지 법원의 연간 재산명시 인용건수는 약 5만9464건이었지만 이 중 연간 평균 기소건수는 135건에 그쳐 전체 재산명시 인용건수 대비 0.22%에 그쳤다.
 
이 변호사는 “재산명시 제도의 실효성을 더 담보하려면 채무자에게 경고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실제로 채무자 재산을 확인할 수 있도록 제도화시켜야 한다. 법원의 직권 명령을 통해서 실제 채권자가 조회할 수 있도록 법제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채무자 협력 의존도를 낮춘 법원 직권 중심의 재산정보 조사제도가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재산명시 절차 중 재산 조회 절차의 전산화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김 변호사는 “현재 재산조회는 은행 이름까지 일일이 모두 특정해서 조회를 해야 하는데 그게 아닌 포괄적인 방법으로 채무자 재산을 조회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면서 “상속인에 대한 재산 조회처럼 포괄적인 재산 조회가 가능하도록 해야 채무자들이 재산 명시에 성실히 응할 가능성이 높다. 재산 조회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재산 명시제도를 보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