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왜 연기를 계속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어요. 당시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죠.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연기에) 부족함을 느끼기 때문인 거 같아요. 더 잘하고 싶어서요.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숙제 중 하나가 '노인 역할'을 제대로 해내는 일이었고 (출연을 제안받았을 때) '지금이라면 잘 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도전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영화 '리멤버'(감독 이일형)는 가족을 모두 죽게 만든 친일파를 찾아 60년간 계획한 복수를 감행하는 알츠하이머 환자 '필주'와 의도치 않게 그의 복수에 휘말리게 된 20대 절친 '인규'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배우 이성민은 알츠하이머를 앓는 80대 노인 '필주'를 연기했다. 1985년 연극 무대 데뷔 후 37년째 연기를 하는 베테랑 배우 이성민에게도 쉽지 않은 역할이었다.

"80대 노인을 연기한다는 게 참 부담이더군요. 외모나 걸음걸이 등뿐만 아니라 박근형 선생님을 비롯한 선배 연기자들과 자연스레 섞일 수 있을지 걱정이 컸어요."
  이성민은 '필주' 역할을 위해 걸음걸이며 목소리까지 변화를 주었다. 어떤 '공식'을 가진 건 아니었지만, 관객들이 '필주'를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게 중요했다.

"'필주'를 저의 일상에 끌어들였죠. 자세나, 걸음걸이 등 짬짬이 생각날 때마다 연습해보았어요. 나름대로 여러 가지 테스트를 해 본 거죠. 일상에서 '필주'의 모습을 그려가며 저에게도 변화가 생겼어요. 나름대로 (연기 방법을) 습득한 거예요.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누르고, 긁어도 보고, 자세도 구부정하게 하면서…그 결과 목디스크를 얻게 되었습니다. 하하하. '필주' 역할 뒤 나름대로 후유증을 겪었어요."

그는 80대 노인으로 분한 자기 얼굴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성민은 "노인 분장을 처음 해 본 건 아니다"라고 말문을 연 뒤, 과거 연극 무대에서 노인 역할을 해 본 적이 있다고 설명했다.

"당시에는 노인 분장을 한 내 모습이 참 어색했어요. 거울을 보며 '아버지와 참 닮았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하지만 '리멤버' 때는 그런 감상에 빠질 새도 없었어요. '분장한 것처럼 보이면 안 되는데!' 온통 그 걱정뿐이었죠."

그의 우려와 달리 영화 '리멤버' 시사회 직후에는 노인 역할을 소화한 배우 이성민에 관한 호평이 쏟아졌다. 이성민은 알츠하이머 때문에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일평생 계획한 복수를 실행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인물을 선 굵은 연기로 표현해냈다.

"촬영을 마치고 2년 만에 영화를 본 거예요. 영화 공개 전에는 걱정이 컸거든요. 대중이 '또 이런 이야기냐'고 물을까 봐요. 하지만 공백기를 두고 (영화를) 다시 보니 신선하고 새롭더라고요. 객관적인 입장에서 영화를 볼 수 있었어요. 그래서인지 눈물도 나더군요. '필주'에게 감정 이입하게 됐던 것 같아요."
  이성민은 영화 관람에 푹 빠질 수 있었던 건 상대 배우인 남주혁 덕이 크다며 치켜세웠다.

"'필주'라는 인물은 그럴 법해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성장했고 온 가족을 잃은 캐릭터니, 그가 가진 서사가 단단하죠. 하지만 현대 관객들에게 '필주'는 어떻게 공감을 살 수 있을까요? 그건 '인규'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했어요. '인규'가 '필주'를 이해하고 동참하기로 하는 과정이 어쩌면 현대 관객들이 느끼는 감정, 젊은 관객의 눈높이 아닐까요? 그런 지점을 (남)주혁 군이 참 잘해주었다고 생각해요."

'필주'와 '인규'는 나이를 뛰어넘는 우정을 보여주며 관객들을 더욱 이야기에 몰입하도록 만든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라면 '필주'와 '인규'가 주고받는 손 인사에 울컥할지도 모른다. 이성민은 '필주'와 '인규'의 손 인사는 모두 연출부에서 만들어준 것이라며 탄생 비화를 알려주기도 했다.

"연출부에서 소스를 주면 저와 주혁 군이 계속해서 연습하는 식이었죠. 손 인사는 탬버린('필주'가 레스토랑에 방문한 손님을 위해 보여주는 개인기)만큼이나 부담이었어요. 생각날 때마다 연습했는데도 NG가 꽤 났어요."

앞서 이성민은 '리멤버' 남주혁을 비롯해 '미생' 임시완, '기억' 이준호, '재벌집 막내아들' 송중기 등 동료 배우들과 세대를 뛰어넘는 브로맨스를 보여준 바 있다. 그에게 후배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기 전 어떤 이야기나 조언을 주고받는지 물었다.

"예전에는 선배들이 후배로서 해야 할 일들을 가르쳐줬어요. 무대에서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하는 일까지 아주 세세하게요. 나이를 먹고 보니 그게 다 쓸데없는 일이더라고요. 시간이 흐른 뒤 어떤 선생님께서 제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상대 배우가 저보다 10살이 적든, 20살이 적든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맞잖아요? 그렇게 만나야 좋은 장면, 좋은 케미스트리가 나온다고 생각해요. (후배들이) 자기가 가진 100%가 나올 수 있도록."
  그동안 후배 배우들과 호흡을 맞췄던 이성민에게 '리멤버'는 새로운 경험을 안겨주었다. 박근형, 송영창, 문창길, 박병호 등 이성민에게도 '대선배'인 배우들과 함께하는 자리를 얻게 된 것이다.

"선생님들과 함께 연기를 하다니. 정말 신기하더라고요. 선생님들이 보여주는 연기가 정말 대단했고 존경스러웠어요. 특히 '김치덕' 장군 역을 맡은 박근형 선생님께서는 부상까지 당했는데 촬영하는 동안 내색도 하지 않으시고 열정적으로 연기하시더라고요. 정말, 정말, 존경스러웠습니다. '나도 저 나이가 되었을 때 저렇게 연기할 수 있을까?' 싶었어요. 모두 열정적이고, 의욕적이셨어요."

37년째 연기 생활 중인 이성민은 "부족함을 느끼기 때문에 연기를 계속한다"고 털어놓았다.

"완벽하게, 잘 해내고 싶은데 끝나고 나면 언제나 아쉬움이 남아요. 그게 어쩌면 저의 원동력 같아요. 계속 갈 수밖에 없죠. 이 작품에서 남은 아쉬움은 앞으로의 작품에서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는 계기가 되겠죠? 계속 그런 일을 해나가다가 죽을 거 같아요."
  그는 '인규'와 같은 젊은 세대 친구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로, "함께 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하기도 했다.

"이 영화가 매력적인 건 한 시대를 사는 이들, 동떨어진 세대가 동행한다는 거예요.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기성세대, 젊은 세대가 함께 어울리고 존중하는 세상이요. 젊은 세대는 나보다 오래 산 이들을 존중하고, 그 세대는 젊은이들을 포용하고 독려할 수 있기를 바라요. 저 역시도 우리 딸을 보면 눈에 안 찰 때가 많거든요. 하지만 과거 내 모습을 돌아보면 (딸아이의) 행동이 이해되기도 해요. 그렇게 반추하면서 '필주' '인규'처럼 동행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