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조의 경제시선] 세계경제 대변동 시대 …위기를 통해 더 강해진다
2022-10-03 16:07
가변성에서 오히려 이익 창출하는 '안티프래질 매커니즘' 사용법
제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국가 위기와 그 해법을 분석한 2019년 저서에서 ‘대변동(upheaval)’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최근 세계 경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최대의 혼란을 맞이하고 있다. 가히 ‘대변동’의 시대라 할 만하다. 2018년부터 본격화한 미·중 패권경쟁, 국제무역질서의 변화, 2019년 글로벌 팬데믹 발생, 그리고 금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촉발된 복합위기 등 불과 5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일어난 일이라고 믿기 어려운 큰 사건들이 연속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들이 나타나는 과정에서 몇 가지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변동성의 규모가 크고 주기도 짧아지고 있다. 앞서 언급한 3대 변화들은 하나하나 충격의 크기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비견할 만하다. 팬데믹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경제적 충격을 가져 왔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20년 세계경제는 4.3% 역성장하였으며,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인 1945년 -9.8% 이후 최악의 역성장을 기록하였다. 팬데믹의 경제적 비용을 경제성장 감소 규모로 추정해 보면 2022년 한 해만 3조8000억 달러(약 4300조원)에 달한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각국이 경제 충격을 완화하기 위하여 지출한 재정지원 규모는 주요 9개국만 따져도 6조4000억 달러(7238조원)이다. 합계 10.2조 달러(1경1154조원) 수준이다.
대규모 경제적 위험이 발생하는 주기도 더욱 짧아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10년 주기의 경제적 변동은 이제 옛날이야기다. 1~2년 내 어떤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날지 누구도 장담 못하는 세상이 되고 있다.
비경제적 위험의 등장도 빈번해지고 있다. 전염병 대유행 위기와 대규모 전쟁 위험이 그것이다. 대규모 전염병 발생 빈도와 주기가 점차 짧아지고 있다. 미국 질병관리본부(CDC)에 따르면 전염병 발생 빈도가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크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1980년대에는 991건에 불과하던 것이, 1990년대에는 1924건, 2000년에는 3420건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일부 전문가들은 앞으로도 이러한 발생 빈도의 증가 추세는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전쟁 위험도 상존한다. 모두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조기에 종결되기를 바라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전쟁의 조기 종결을 비관하고 있고, 심지어 확산 가능성마저 배제하지 않는다.
‘대변동’은 국제협력과 공조 체제도 빠르게 무너뜨리고 있다. 지난 6월 인도네시아 G20 외교장관 회의에 이어 재무장관 회의도 '빈손'으로 끝났다. 글로벌 경제위기에 대한 ‘느슨한 해법’이나마 기대했던 지구촌에 실망만 안겨 주었다. 지난 6월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정상회의 이후 본격화하고 있는 새로운 냉전 구도는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냉전 체제는 과거와 같이 결속력이 강한 진영 분리로는 가지 않을 것이다. 냉전 1.0과 같은 진영 내 국가들데 대한 확고한 지원, 공조 의지나 조율 메커니즘도 없기 때문이다. 같은 가치를 공유한다고 하지만 각자도생의 움직임이 노골적으로 뒤섞여 있다. 필요에 따라 모인 ‘선택적 동맹’에 불과해 보인다.
느슨한 진영 분리와 선택적 동맹은 국제 공조 시스템의 해체를 촉진한다. WTO가 무역조정기구로서 역할을 하는지 의심스럽다. 강대국들의 분쟁에는 적극적인 조정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백신·의료장비 등 수출 제한 조치가 있는 때도, 금년 26개국이나 식량 수출 금지할 때도 WTO는 그냥 침묵하였다. G7과 G20도 이제 제대로 기능하기 어렵게 되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입장 차이로 G20은 이미 무력화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러시아, 중국을 참여시키기도 안 하기도 어려운 딜레마에 빠졌다. 앞으로 G20 회의는 개최하기 어렵고 하더라도 의미 있는 국제 협력을 이끌어낼 것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변동성의 양적 질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경험하는 충격과 피해의 양상은 거의 유사하다. 대외적 충격이 일어날 때마다 자산시장이 급변동한다. 우리 부동산과 주식시장, 신용시장은 유달리 민감하게 반응한다. 빠지지 않는 것은 또 있다. 외환 유동성 위험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와 원인은 다르지만, 결과는 비슷하다. 종전과 다른 점을 찾는다면, 최근의 대외 충격이 지정학적 복잡성을 동반하고 있다는 점 정도이다.
대규모 충격이 짧은 주기로 발생하는 상황에서는 지금까지의 대응 방법만으로는 효과적 해결이 어려워지고 있다. 특히 전통적인 거시경제 대응은 정책 결정과 집행과정에 수반되는 시차로 인해 신속한 대응이 요구되는 ‘대변동’의 시대에는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관점을 바꿀 때가 되었다.
통합적 위험관리 시스템 구축
위기와 위험을 구분해서 쓴다면, 위험은 아직 현재화하지 않은 위해요소이고 위기는 그러한 위해 요소가 현재화된 상태를 의미한다. 위험관리는 사전적으로 위해요소를 관리하는 것이며 위기관리는 그 위해요소가 실제로 나타난 경우 제거하기 위한 과정으로 구분한다.
지속적인 위험관리가 유지되는 경우 위기관리의 효과성이 높아진다. 위험요소를 지속적으로 관찰해 오는 경우 이해도가 높고 대응수단도 미리 준비할 수 있다. 무엇을 알고 모르는지 알기 때문에 대응속도가 빨라진다.
위험관리의 기본은 헤지(위험회피)와 분산이다. 위험요소(risk factor)가 명확하게 파악될 때는 그 요소에 대해 헤지할 수 있다. 그 위험요소를 상쇄하는 투자를 통해 전체적인 손익구조를 중립적으로 만드는 전략이다. 위험요소가 명확하게 인식되지 않거나 되더라도 헤지 수단이 없는 경우에는 분산화 전략이 최선이다.
거시경제 차원에서 순수한 의미의 위험관리 기능이 작동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거시경제 위험은 위험요소를 알더라도 정확하게 상쇄할 만한 수단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분산전략은 재원 제약만 없으면 실행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수출지역 다변화, 공급망 다변화 전략이 그 예다.
거시경제 차원에서 통합적 위험관리 체계를 만들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거시경제정책은 기능별로 역할분담이 되어 있고, 때로는 독립적이거나 민주 통제 원리가 적용된다. 이러한 민주적 통제는 위험관리 측면에서는 양면적이다. 정부 실패, 권한 남용 등 자체의 위험을 제어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현재와 같은 대변동 위험에 대한 대응을 복잡하고 느리게 만들 수도 있다.
이처럼 여러 가지 제약이 있지만, 위험관리 기능의 통합성을 강화하는 것은 중요하다. 특히 비경제적 위험이 거시경제 위기로 이어지는 일이 빈번해지는 상황에서 경제적 위험과 비경제적 위험을 통합적으로 감시하고 관리하는 역량을 갖추지 않고서는 대응이 어렵기 때문이다. 군사적 충돌 위험, 전염병 위험 등을 하나의 통합된 체계 내에서 위험 정보를 공유하고 시나리오 대응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정부 조직과 기능을 재설계 해야 할지 고민할 때다.
안티프래질 메커니즘 확대
우리가 익숙한 위험관리 방식은 기본적으로 과거 경험치를 기초로 한다. 과거 경험에 근거해서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는 것은 이성을 가진 인간에게 기대되는 행동 양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적 예측에는 위험성이 있다. 과거의 경험을 관성적으로 믿고 그에 따라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주인에게 생명을 맡긴 칠면조만큼이나 위험한 일이 될 수 있다.
빈번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위험에 대비하는 새로운 통찰로서 ‘안티프래질’(anti-fragil) 개념이 있다. ‘블랙 스완’으로 유명해진 나심 탈레브의 저서 <안티프래질, 2013>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나심 탈레브는, 복잡계적 특성을 가진 시스템에서는 가변성과 무작위성에 의해 ‘깨지기 쉬운(fragile)’ 단위와 오히려 ‘더욱 활성화되는(anti-fragile)’ 단위가 있다고 한다. 안티프래질은 단지 단단함이나 강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변성으로부터 이익을 얻거나 더욱 성장하는 것을 뜻한다.
“안티프래질은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의미하고, 하강국면보다 상승국면에 더 많이 있고, 비대칭성을 띠는 것과 무작위성을 오히려 좋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중략). 틀렸을 때 잃는 돈보다 옳았을 때 버는 돈이 더 많다면, 결국 무작위성으로부터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나심 탈레브, <안티프래질>2013)
‘안티프래질’의 개념은 대변동 위험을 관리하는 데 활용 가능한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한다. 위험을 소극적, 수동적으로 제거하는 것 외에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익을 창출하거나 더 강해지는 조건에 주목하게 한다. 안티프래질의 관점에서 보면 우선적으로 준비해야 하는 몇몇 분야들이 눈에 띈다. 외화유동성 확보 전략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외화 유동성은 결국 미국 달러유동성 확보다. 외환보유고를 충분히 쌓는 것은 가장 손쉬운 방법이지만 기회비용이 크다. 그간 유동성 위험이 고조될 때마다 미국, 일본 등과 한시적 통화스와프협정으로 대처해 왔다. 이제는 미국과 '상설 통화스와프 협정'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물가안정을 위해 강력한 긴축정책을 취하고 있는 미국이 달러 유동성을 타국에 열어 주는 것은 당장 동의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미래를 대비한다는 점과 상징적인 측면에서 '상설 스와프협정'은 추진할 가치가 있다. 상설 스와프협정은 ‘칩4동맹’,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 등 한·미간 경제안보 동맹 강화에 실체적인 구성요소가 될 것이다. 현재 미국과 상설 스와프협정을 체결하고 있는 국가는 영국, 일본, EU, 캐나다, 스위스 5개국이다. 한국은 이들 5개국에 못지않은 전략적 무게를 가진 나라다.
국제공조시스템 복원을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강대국이 만들어 놓은 국제 질서와 조정메커니즘에 참여하고 활용하는 데 익숙하다 보니 그것을 스스로 만든다는 생각은 아직 없는 듯하다. 그러나 한국은 G7에 초청된 나라이면서 G20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온 중강대국(middle power)로서 더 이상 국제정치 무대의 신참자가 아니다. 한국은 첨단기술을 가진 무역 대국이면서도 각종 국제분쟁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나라다. 중간조정 역할을 하기에 명분과 역량이 충분한 나라다. 글로벌 협력 메커니즘을 복원하는 것은 통합적 위험관리와 위기관리의 중요한 부분이다.
대변동의 시대를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위기관리를 포괄하는 ‘통합적 위험관리’ 시스템을 구축하는 한편 예측하지 못한 위험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다양한 ‘안티프래질 메커니즘’을 고민하고 구체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전병조 필자 주요 이력
▷전 KB증권 대표이사 ▷전 기획재정부 본부국장 ▷전 대통령비서실 행정관 ▷전 아시아개발은행 이코노미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