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신제국주의 형상 IRA, 아직 시간은 남았다

2022-09-04 07:00

1911년 인도를 방문한 영국 국왕 조지 5세는 대규모 무리를 이끌고 벵골 호랑이 수십 마리를 잡는 ‘사냥 파티’를 벌였다. 사냥 파티는 호랑이 외에도 불곰과 코뿔소 등을 포함하고 있으며, 단순한 유희 본능이 아닌 영국이 인도를 지배할 강력한 힘의 소유자임을 보여주는 일종의 무력행사였다.

영국 왕족은 인도 외에도 세계 곳곳의 식민지를 돌며 이러한 무력행사를 자행했다. 일부 아프리카 국가는 영국 왕족의 사냥 파티로 인해 사자 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지금도 온전한 회복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제국주의의 형상은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여전한 모습이다. 최근 미국의 반도체 동맹 ‘칩4’와 전기차 보조금 제외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은 표면적으로 고상한 척을 하지만 20세기 초 서구 열강의 식민지배 퍼포먼스와 다를 바 없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유일의 제국으로 군림한 미국이기에 중국의 패권 도전은 단단히 화가 날 만하다. 중국도 타협 없는 직진을 고수하고 있으니 두 제국주의의 충돌은 필연적인 수순이다. 다만 그 사이에 낀 우리나라는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진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막대한 손실이 불가피한 구도다.

얼마 전 IRA 제정에 항의하기 위해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우리 정부대표단에 질책이 쏟아지고 있다. 일본은 IRA 초안이 나오자마자 정부와 기업이 합심해 대책을 마련했건만 우리 정부는 뭐하다가 뒷북만 쳤냐는 비판이다. 덕분에 전기차 대응이 늦은 도요타는 IRA로 시간을 벌었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미국 시장에서 전기차 점유율 2위로 치고 나간 현대차와 기아가 제동이 걸리면서 도요타가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다는 해석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만 이번 IRA를 통해 우리 정부는 급변하는 정세를 심각히 바라볼 필요가 있다. 정파 싸움에 골몰하다가 급변하는 산업 지형에 넋 놓고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평소 산업계와 긴밀히 공조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이번 IRA 대응에서 보여준 것처럼 더 이상의 공염불은 곤란하다. 지금이라도 주요 현안을 미리 파악할 수 있는 공동 레이더 구축에 힘을 모아야 한다.

다행스럽게 아직 IRA가 굳어지지 않았다. IRA 적용의 유예 가능성이 남았기 때문이다. 유예를 촉구하기 위한 국내 기업의 미국 투자 지연 등 응수타진의 기회도 엿봐야 한다.

현대차와 기아는 ‘아이오닉5’와 ‘EV6’가 미국 시장에서 날개 돋친 듯 팔리는 점을 십분 활용해야 한다. 미국은 국내와 다르게 딜러를 통한 판매망이 견고하다. 인기 있는 차량은 딜러 재량에 따라 웃돈이 붙어 아이오닉5와 EV6의 웃돈은 최대 1만 달러 정도로 알려졌다. 이 정도의 웃돈이라면 전기차 보조금이 붙느냐 안 붙느냐의 문제가 아닌, 차를 적기에 인도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우선이다. 완성차 업계 전반을 둘러싼 공급자 우위 현상이 여전함을 보여준다. 

다만 공급자 우위 시장이 길게 가더라도 1년 이상 이어질지 미지수다. 이 시장이 1년 이상 간다고 전제하면 그 시간에 정부와 산업계가 공동 대응으로 유의미한 결과를 맺어야 한다.

손자병법은 지략으로 적을 굴복시키는 방법을 으뜸의 병법이라 말한다. 차선은 외교로 이기는 것이요, 다음으로는 무력으로 군대를 공격하는 것, 최하는 성을 공격하는 것이다. 성 공격이 최하책인 이유는 굳게 닫힌 성문을 열기도 힘들고 그 과정에서 아군의 출혈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패권경쟁 구도로 급변하는 국제 질서에서 우리의 미래 전략은 무엇일지 반문할 필요가 있다. 이번 IRA는 분명 위기이자 기회다. IRA가 산업 전반의 전열을 정교하게 재정비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김상우 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