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썩은 살을 도려내야 산다

2022-09-06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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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해운 구조조정이 본격화하면서 2016년 1분기 은행권 부실 채권 규모는 31조원 이상 쌓였다. 외환위기 이후 최고 수준이었다.
 
농협은행은 STX조선해양과 창명해운 등 조선·해운업 구조조정으로 관련 대출채권이 대거 부실화해 1조2401억원이나 되는 손실을 떠안았고, 산업은행‧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과 시중은행들의 타격도 만만치 않았다.
 
회생 기미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 돈을 쏟아부으면서 생명을 연장시켜준 잘못된 정책의 결과였다. 당시 수조 원의 리스크를 떠안은 금융사들은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빚으로 연명하는 이른바 ‘좀비기업’에 대한 이슈가 날로 뜨거워지고 있다. 조선‧해운 구조조정 사태 때처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의 재정 지원이 우리 경제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특히 금리 인상이 본격적으로 이뤄지면서 그 우려는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도 “우선 살리고 보자”는 정부 정책에 유동성은 끊임없이 공급되고 있다. 기간산업안정기금, 채권안정펀드, 긴급대출 등 역대급 재정 정책에 기업의 빚은 기하급수로 늘어가고 있다. 금리가 가파르게 올라감에도 불구하고 고유가·고환율 등을 이유로 정부 지원은 더 늘어가고 있다.

실제로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달 말 기준 은행권 기업대출 잔액은 1137조4000억원으로 한 달 새 12조2000억원 늘며 7개월째 증가세를 이어갔다. 7월 기준으로 따지면 2009년 6월 관련 통계 작성 이후 가장 큰 폭으로 불어났다. 금리가 고공 행진하는 가운데 가계대출이 7개월 연속 감소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는 글로벌 금융시장 변동성 확대로 회사채 발행이 어려워지면서 기업들이 은행 대출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체율이 급격히 늘어날 수 있다는 점은 더욱 큰 문제다. 대규모 재정 지원이 이뤄지면서 상반기 기업의 연체율은 둔화됐지만 경기 불황이 장기화하고 유동성 공급이 한계에 달했을 때 기업의 리스크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특히 실물경제에서 금융으로 리스크가 전이되고 있어 은행들이 대출 문턱을 높이면 기업의 연쇄 부도는 불가피한 상황이 된다.
 
이미 기업의 부실 징후는 여기저기서 포착되고 있다. 지난해 기업들의 경영 여건이 악화되면서 번 돈으로 이자도 못 갚는 한계기업, 즉 ‘좀비기업’ 비중이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특히 경기 침체가 다시 시작되면 기업의 부채비율은 갈수록 높아지는 가운데 부실 기업은 더욱 급증할 것으로 우려된다. 고유가와 고환율로 인해 수입 기업을 비롯해 항공‧해운 등 상당수 기간산업에 피해가 예상된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이자보상배율이 1에 못 미치는 기업은 1675개 상장사 중 690개로 집계됐다. 상장사 중 41.1%가 영업이익의 대부분을 이자로 내고 있는 셈이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 11.1% 늘어난 수치이기도 하다. 번 돈으로 이자도 감당하지 못하는 기업들도 기하급수로 늘고 있다.
 
문제는 정부가 부실기업 구조조정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정작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심’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정권은 내심 사회적 고통이 따르는 구조조정을 반길 리 없다. 일단 부실기업 옥석 가리기를 통해 구조조정에 나서겠다고 공언은 하지만 이미 정치권의 유무형 압력에 이를 관철할 의지도 능력도 보이지 않는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부채 폭탄’은 생각지도 못한 채 무조건적인 재정 지원만 주문하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는 2008년 금융위기보다 더욱 혹독하고 고통스러웠던 시절이지만 ‘축복된 재앙’으로도 불린다. 비록 미완(未完)에 그쳤지만 위기를 동력 삼아 구조조정을 밀어붙여 경제가 일정 부분 질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결국 기업 구조조정이 제대로 추진돼야만 효율적 자본 배분이 이뤄지고, 이를 통해 우리 경제가 한 단계 성숙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좀비기업과의 전쟁, 위기를 지렛대로 삼기 위해 금융당국을 넘어 정권 차원에서 명운을 걸 일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정치적 포퓰리즘과 저금리 기조에 편승해 빚으로 연명해 온 기업은 계속해 늘어났다. 정권 초반에 또다시 포퓰리즘으로 인해 좀비기업 청산의 칼을 꺼내들지 못할 수도 있다.
 
더 이상 늦춰서는 안 된다. 과감한 수술 없이 산소호흡기를 채우는 데 그치는 지금과 같은 우유부단한 부실기업 정리 방식으로는 경제 회복도, 경제생태계 복원도 모두 신기루일 뿐이다. 결정을 미루다 사후약방문 격 처방을 했을 땐 우리 경제가 심각한 치명상을 입고 난 후일 것이다.
 
썩은 살을 미리 도려내야 경제가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