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선 칼럼] 되풀이 되는 극단적 저주와 증오의 정치
2022-07-07 16:18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소설가 고(故) 박완서의 오빠 얘기도 그러하다. 박완서는 열 살 위의 오빠와 각별한 사이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녀에게 오빠는 아버지였고 우상이었다고 박완서는 회고한 적이 있다. 그런 오빠가 6·25전쟁 때 죽었다. 그래서 박완서의 초기 작품들에는 오빠의 죽음이 남긴 고통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온다.
박완서가 오빠를 잃었던 사연은 「엄마의 말뚝2」에 나온다. 오빠는 해방 후 한때 좌익운동에 가담했다가 전향한 적이 있었다. 그것 때문에 6·25 직후 서울을 사수할 것이라는 방송만 믿고 피란 기회를 놓쳐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 남게 되었다. 세 달 만에 서울 수복이 이루어지고 다시 세상이 바뀌자 가족들은 빨갱이 집안이라고 박해를 받았고 오빠는 국군에게 끌려갔다. 돌아온 오빠는 이미 몸과 정신이 속속들이 망가져 정상적인 사람의 모습을 잃고 말았다. 다시 1·4 후퇴령이 내려지고 서울이 인민군 치하가 되었을 때, 오빠가 그 지경이 된 진상을 기어코 알고자 했던 보위군관은 바른 말을 하라며 오빠에게 총을 쐈다. 결국 오빠는 출혈로 인해 며칠 후 사망하고 말았다.
박완서는 당시의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전쟁은 인간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 인간의 얼굴을 했다가는 이길 수 없는 것이 전쟁의 속성인지도 모른다. 이미 70년이 지난 역사 속의 일들을 다시 떠올린 것은 최근 목격한 광경들 때문이다. 어느 전직 기자가 페이스북에 ‘촛불혁명과 먹물의 위선’이라는 연재물을 올리고 있었다. 거기에는 대선을 전후로 더불어민주당 혹은 이재명 의원을 비판했던 ‘먹물’들을 ‘위선’과 ‘변절’의 잣대로 공격하는 내용의 글들이 연재물로 계속 올라왔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동조 댓글들도 이어졌다. 정치적 견해 차이에 따라 서로를 비판하는 일이야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실이 아닌 허위로 인신공격을 하며 상대를 악마로 만들어 버리는 모습이다. 대선 당시 국민의힘이나 윤석열 후보를 지지한 일이 없던 사람들조차도, 단지 민주당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위선’과 ‘변절’의 낙인이 찍혀야 했다.
‘변절’이라는 낙인은 과거 일제 강점기나 군사독재 시절에나 가능했던 프레임이다. 그 시절에는 선과 악의 이분법이 가능할 수 있었기에 그들의 편에 선 사람들을 가리켜 그런 딱지를 붙이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이 2022년이다. 더 이상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들을 재단하기에는 모든 것이 너무도 복잡하고 다양해진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이 다양성의 시대에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조차 판단하기 어렵지만, 원래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선과 악이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이기도 하다. 국민의힘이든 민주당이든, 윤석열이든 이재명이든, 누구를 지지하거나 반대했다고 해서 ‘위선과 변절’의 비난을 받아야 할 정도로 지금의 세상은 단순하지 않다.
그러니 박완서 오빠의 죽음을 어디 70년 전의 전설 같은 얘기라고만 넘길 수 있을까. 우리 시대에 횡행하고 있는 극단적인 증오와 저주의 정치 또한 그런 폭력과 본질에서 다르지 않다. 나와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위선과 변절’의 낙인을 찍어대며 인간적인 폭력을 가하는 집단적 문화 또한 그 옛날의 참혹했던 광경들과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아직도 이념의 노예가 되어, 총만 들지 않은 전쟁과도 같은 정치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대학원 사회학 박사 ▷경희대 사이버대학교 NGO학과 외래교수 ▷한림대 사회학과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