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의 베트남 ZOOM IN] (33) 국민이 통합하면 불가능은 없다
2022-04-19 20:19
골리앗 프랑스 물리친 '디엔비엔푸의 기적"
지금으로부터 68년 전인 1954년 5월 7일 전 세계는 경악했다. 프랑스가 라오스 국경에 인접한 베트남 소도시 디엔비엔푸에서 대패하였기 때문이다. 디엔비엔푸 전승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베트남 역사의 현장이다. 디엔비엔푸 전승은 불가능해 보였던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달성케 했다. 디엔비엔푸는 ‘붉은 나폴레옹’ ‘득보잡’ ‘베트남 인민군의 맏형’ ‘베트남의 신장(神將)’이라고 하는 보응우옌잡 장군이 직접 지휘하여 승리의 대명사가 된 피와 땀의 현장이다. 보응우옌잡 장군을 ‘득보잡’이라고도 하는데, ‘보잡’은 보응우옌잡 이름을 성과 끝 이름으로 부르기 쉽게 축약한 것이고, ‘득’은 베트남어로 신(神) 또는 성자(聖者)라는 의미이니 ‘보잡신(神)’ 정도로 높여 부르는 애칭이 되었다. 보응우옌잡은 중국의 마우쩌둥, 중남미 혁명의 아이콘 체 게바라와 함께 세계 게릴라전의 3대 전략가로 손꼽힌다.
20세기에 베트남이 치른 3차례 전쟁 가운데 제1차와 제2차 베트남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잡 장군은 지난 2500년간 인류 전쟁사에 알렉산더 대왕, 한니발 장군,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미 해군의 체스터 윌리엄 니미츠(Chester W. Nimitz) 제독과 같은 명장의 반열에 오른 한 사람이다. 잡 장군은 1946~1954년 프랑스와 치른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본인으로, 전쟁의 대미를 장식한 디엔비엔푸 56일간의 전투는 1954년 3월 13일 시작해 5월 7일 끝났다. 결과는 베트남의 완벽한 승리였다. 잡 장군은 6개 보병사단 가운데 5개 사단(308, 304, 312, 316, 351사단)을 지휘하여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1862년 6월 5일 제1차 사이공조약이 체결된 이후 지속된 83년간의 프랑스 식민지배를 완전히 종식시켰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아시아 국가가 유럽 국가와 싸워서 승리한 최초의 전투였다. 당초 프랑스 극동 원정군은 승리를 장담했다. 프랑스는 은밀하게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나 대적하는 비엣민(越盟) 군은 대포도 없고 탄약도 없었다. 반면 소련과 중공은 비엣민을 비밀리에 그러나 매우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프랑스 극동 원정군은 라오스 국경의 소도시 디엔비엔푸에 공군 요새를 구축했다. 비엣민이 라오스와 연합하는 것을 차단하고, 비엣민 군을 교통 맹지인 내륙 깊숙이 끌어들여 군수품 보급을 어렵게 하여 전세를 프랑스에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전략이었다. 또한 프랑스는 비엣민이 대공화기가 없기에 공군력으로 제압하려고 했다. 그러나 보응우옌잡은 놀랍게도 프랑스 공군 기지를 포위하였고, 개전과 동시에 수많은 포탄을 발사해 활주로를 파괴함으로써 프랑스 공군력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디엔비엔푸는 홍하강 델타에 있는 하노이 중심부에서 455㎞ 정도 떨어져 있는 산악지대로 비엣민이 프랑스 정찰기를 피해 대포나 대공화기를 운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디엔비엔푸는 강원도 양구군에 있는 ‘펀치볼 전투’ 지구처럼 둘레가 산으로 둘러싸인 화채 그릇처럼 생긴 분지였다. 산에는 야생 짐승들이나 다닐 수 있는 길만 있어 비엣민 군대가 대포를 운반할 방법은 없었다. 프랑스 군은 공군 기지 외곽 경비와 주요 접근로만 경계했다. 그러나 비엣민 군은 대포를 절단하여 야간을 이용하여 말, 소, 물소 등 축력을 이용하여 옮겼다. 절단된 대포를 숲에 은폐시켜 놓고 용접하여 대포로 다시 만들어 썼다. 분해하거나 절단하지 않은 포는 밧줄로 묶어 축력과 인력으로 밀고 당겨서 정글을 헤치고 끌고 올라가 공군 기지를 목표로 사방에 배치해 놓았다. 병법에도 나오지 않는 기상천외한 무기 운송 방법이 동원된 것이다. 이렇게 힘겹게 옮긴 대포로 비엣민 군은 개전과 동시에 활주로를 파괴하였고, 공군력이 무력화된 프랑스 군은 병력 손실을 메울 추가 배치가 불가능했고, 보급이 끊겨 군수품은 점점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투력은 상실되어갔다. 5월이 되자 2개월 동안이나 보급을 받지 못한 프랑스 군은 거의 포위되어 자포자기 상태에 이르렀다. 일부는 라오스로 패주를 했다. 패색이 짙어지자 프랑스 정권에 위기가 왔고, 신임 총리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Pierre Mendès France)는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 군을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군 철수는 인도차이나반도 식민지 3개국인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프랑스 극동 원정군 병력 1만5000여 명 가운데 전사자를 제외하고 부상병 4436명 포함 8000명이 비엣민 군의 포로가 되었다. 결국, 프랑스 군은 무조건 항복만이 유일한 살길이었다.
첫째는 국민 통합이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은 1946~1954년 프랑스와 치른 독립전쟁이었다. 승리의 요인에는 국민 통합을 이룩한 호찌민과 보응우옌잡의 영도력이 있었다. 지역 간 통합, 소수 민족 간 통합, 세대 간 통합으로 프랑스를 상대로 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베트남에는 지방마다 특유의 문화적인 전통은 있으나, 영호남과 같은 이분법적인 지역갈등은 없다. 54개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임에도 민족 간 갈등도 없다, 세대 간 갈등도 없다, 베트남에는 ‘사해개형제(四海皆兄弟)’라는 말이 있다. ‘온 천하가 모두 형제’라는 것이다. 국민 모두 형제자매이니 2인칭 대명사를 모두 친족 명사로 쓰고 있다. 베트남에서는 누구나 상대방을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른다. 나이 차이가 크면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고모, 이모 등으로 부른다. 군대에서 계급장을 달지 않아도 모두가 형제이니 상하 질서가 엄연하다.
둘째는 국민 하나하나를 모두 ‘1인 다역(多役)’을 하게 하였다. ‘1인 다역(多役)’이란 농부이면서 혁명 전사, 학생이면서 정보원 역할, 병참 수송, 슬리퍼 등 보급품 자체 제작 등 각자 역량에 맞는 업무를 부여하여 전쟁을 수행하였다. 병력이 부족한 비엣민은 전선에서 필요로 하는 만큼 훈련된 병사를 확보할 수 없고, 보급도 충분히 해줄 수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 택한 궁여지책이었다.
셋째는 국민을 대동 단결시켰다. 온 국민을 하나로 단결시켜 프랑스와의 독립투쟁 대열에 합류시켜 전투력을 증강했다. 절대 기도비닉(企圖秘匿)하여 아군의 일거수일투족이 프랑스 군에게 발각되는 일이 없었다. 수많은 비엣민 군과 국민이 일치단결하였기에 장기간에 걸쳐 중화기를 운반했음에도 외부로 정보가 누출되지 않았다. 단결력은 베트남 민족의 오랜 전통이다. 반면에 프랑스 군은 비엣민 군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비엣민 군이 무기를 어디에 어떻게 배치했는지, 어떤 무기가 얼마나 있는지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호찌민 정부는 각 분야별로 ‘나라 사랑 경시대회’를 해마다 실시하여 경쟁적으로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우수한 성과를 낸 창의적인 인물을 선정하여 격려하고 시상하였다. 인재를 등용하는 데 능력과 애국심을 잣대로 삼아 임무를 부여하였다. 프랑스 외세를 척결하고 독립을 달성하는 문제는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라, 베트남 민족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였다. 국민 통합에 대한 지도자의 철학이 승리의 원동력이었고,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달성시킨 원동력이었다.
진영 논리는 국민 통합에 적(敵)이고 독(毒)이다. 이러한 독(毒)을 완벽하게 제거하는 것이 한반도 통일을 앞당기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국민이 통합하면 불가능은 없다.
안경환 필자 주요 이력
▷한국글로벌학교(KGS) 이사장 ▷하노이 명예시민 ▷전 조선대 교수 ▷전 한국베트남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