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경제 살린 중앙은행 총재, 사임길 막혀...푸틴 재지명에 3연임

2022-03-25 05:00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기 위한 서방 국가들의 전방위적인 금융·경제 제재에도 러시아 경제가 버티고 있다. 러시아 중앙은행의 재빠른 통화 정책 대응과 수년간 쌓아 온 외환보유고가 방패막이가 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을 주도한 엘리나 나비울리나 러시아 중앙은행 총재가 재차 사의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지며 시장은 러시아 경제 정책 향방을 주목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규탄하기 위해 서방 국가들은 러시아 금융기관과 중앙은행, 국부펀드와의 거래를 금지했다. 특히 지난달 26일 미국·영국·유럽연합(EU) 등 서방 국가들은 러시아 은행들을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 결제망에서 배제하며 이른바 '금융 핵무기'로 불리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이에 그간 나비울리나 총재가 쌓아온 약 6430억 달러(약 784조7815억원) 규모의 외환보유고에 접근할 수 없게 되면서 러시아는 한때 디폴트(채무 불이행)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이후 러시아는 미국 재무부 해외자산통제실(OFAC)의 임시 허가나 스위스 은행의 비자금 등을 통해 달러화 국채 이자를 지급하며 디폴트 위기를 넘겨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서방의 초강력 금융 제재가 이어지고 있지만, 러시아는 파격적인 기준금리 인상, 루블화 표시 국채 매입 등을 통해 대체로 성공적으로 제재에 대응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지난달 28일 러시아 중앙은행은 우크라이나 사태를 규탄하기 위한 제재가 이어지며 혼란이 빚어지던 중에도 기준금리를 기존 9.5%에서 20%로 인상했다. 전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세) 격화가 확연해지고 있는 가운데 발빠른 대응이라는 평가다. 이후 은행은 높은 기준금리를 유지하는 한편, OFZ(루블화 표시 국채) 매입 등을 통해 경제 시장 안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앞으로 EU 등 비우호국 명단에 오른 국가들에게서는 러시아산 가스 판매 대금을 루블화로만 받겠다고 결정한 것 역시 루블화 안정에 도움을 주고 있다. 블룸버그·로이터 등 외신들은 23일 푸틴 대통령이 정부 관료들과의 회의에서 서방 국가들이 러시아의 자산을 동결하며 신뢰를 붕괴했다고 밝히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비우호국들에게서는 가스 판매 대금을 루블로만 받겠다고 선언했다고 밝혔다. 이어 러시아 중앙은행에게는 일주일 안에 천연가스 대금을 루블화로 결제하기 위한 시스템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EU 국가들은 그간 주로 유로화로 가스 대금을 결제해 왔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번 발표는 루블화 가치 방어가 목적이라고 분석했다. 달러화나 유로화 등 서방 통화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폭락한 루블화에 대한 수요를 늘려 가치를 떠받치겠다는 설명이다.

푸틴 대통령의 발표에 루블화 가치는 급등했다. 블룸버그는 23일 종가 기준 루블화 가치가 전일 종가 대비 8.52% 상승한 달러당 95.0207루블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전 거래일 종가는 달러당 103.1130루블이었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의 경제 살리기를 돕고 있는 엘비라 나비울리나 총재가 재차 사의를 표명했다는 보도가 나오며 일각에서는 나비울리나 총재가 사임에 성공할 경우 러시아의 경제 역시 무너질 수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

블룸버그는 23일 사안에 정통한 소식통 네 명을 인용해 나비울리나 총재가 여러 차례 사임 의사를 표시했지만, 푸틴 대통령이 이를 모두 거절했다고 밝혔다. 소식통들은 나비울리나 총재가 현재 사퇴한다면, 이는 푸틴 대통령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현재까지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사임한 고위 관리는 옛 소련 붕괴 후 러시아의 시장경제 개혁을 이끈 설계사로 평가받는 아나톨리 추바이스 대통령 특별 대표 한 명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비울리나 총재의 임기는 오는 6월 24일 종료될 예정이었지만, 지난달 푸틴 대통령은 그를 차기 총재로 재지명했다. 이에 2013년부터 러시아 중앙은행 총재 자리를 맡아온 나비울리나 총재는 다시 5년 동안 직책을 맡게 됐다.

재지명된 이후 나비울리나 총재는 이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블룸버그는 총재가 2일 러시아 중앙은행 직원들에게 보낸 짧은 영상을 통해 중앙은행 내부에서 큰 격변이 있음을 암시했다고 밝혔다. 나비울리나 총재는 "정치적 논쟁을 피하자"며 "업무를 진행하기 위해 써야 할 힘을 정치적 논쟁에 쓰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그는 현재의 경제 상황이 극단적이라고 언급하며 "우리 모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고 전했다.
 

엘리나 나비울리나 러시아 중앙은행 총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나비울리나 총재는 은행가들 중에서는 입지전적인 인물로 꼽히는 인물이다. 2013년 러시아 중앙은행 총재로 임명되면서 주요 8개국(G8)에서 처음으로 여성 중앙은행 총재로 인명되었으며, 포브스에서도 여러 차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중 하나로 선정됐다. 2017년에는 은행 전문 매체 더뱅커에서 유럽 부문 올해의 중앙은행가로 꼽히기도 했다.

이미 우크라이나와 관련한 서방의 제재에 대응한 경험도 있다. 지난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크름반도(크림반도)를 무력으로 합병한 이후 미국과 유럽 등 서방 국가들은 이에 제재를 가했다. 이후 유가 역시 급락하며 원유 수출 수입에도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는 러시아 경제는 큰 위기를 겪었다. 당시 달러화 대비 루블화 가치도 50% 가까이 폭락했다. 

이에 나비울리나 총재는 루블화 가치를 부양하기 위해 700억 달러 이상을 쏟아부으며 대응에 들어갔다. 그러나 뚜렷한 효과를 보지 못하자 이후 루블화 환율을 자유변동환율제도로 돌리고, 기준금리를 17.5%까지 올리며 단호하게 대응했다. 러시아 경제가 침체에 빠졌지만, 계속해서 이러한 보수적인 통화 정책을 고수한 결과 러시아 경제는 다시 성장세로 돌아섰다. 인플레이션 역시 소련 붕괴 이후 사상 최저 수준으로 하락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로 인해 나비울리나 총재의 능력에 대한 평가가 높아졌으며, 총재는 푸틴 대통령의 신뢰를 얻었다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은 다른 러시아 정부 관리들 앞에서 나비울리나 총재의 긴축적 통화정책을 옹호하는 등 그를 전적으로 신임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블룸버그는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일방적인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푸틴 대통령의 전쟁에 일조하고 있는 나비울리나 총재 역시 비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최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을 전쟁범죄자라고 언급했으며, 미국 국무부 역시 23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과정에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고 공식화했다.

2014년부터 2017년까지 우크라이나 중앙은행을 이끌었던 발레리아 곤타레바 전 우크라이나 중앙은챙 총재는 "나비울리나 총재가 매우 전문적이며, 경험 있는 거시경제학자이자 중앙은행 총재라는 데 대해서는 의문이 없다"면서도 "그러나 (올바른) 가치관이 없는 전문성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FT에 단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