⑫고려 충신이 무등산 자락에 지은 독수정

2022-01-05 13:44

 전신민이 세운 딤양 누정(樓亭)문화의 원조
  
  지난해 말부터 TV드라마 ‘이방원’이 방송 중이다. 오랜만에 찾아온 정통 사극이어서인지 마니아층의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주말 방송분에서는 이방원(李芳遠·1367~1422)이 정몽주(鄭夢周·1337~1392) 를 죽이는 장면이 나왔다. 드라마 속에서 고려는 곧 멸망할 것이다.
  1392년 이성계(李成桂·1335~1408)와 정도전(鄭道傳·1342~1398) 그룹이 조선을 건국하자 고려 유신(遺臣) 72인이 개성의 광덕산 서쪽 기슭으로 모였다. 이들은 이 마을의 동쪽과 서쪽에 문을 세우고 빗장을 걸어 잠근 채 문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조선과의 새로운 인연을 거부하고 고려를 향한 일편단심을 끝까지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이곳을 두문동(杜門洞)이라 부르게 됐고, 두문불출이라는 말도 생겼다. 이성계는 72인을 회유했으나 그들이 꿈쩍도 하지 않자 두문동에 불을 질렀다는 얘기도 전해온다. 이렇게 최후를 맞이한 이들을 ‘두문동72 현(賢)’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개성을 등지고 호남으로 내려온 충절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명이 전신민(全新民·생몰년 미상)이다. 전신민은 고려 공민왕 때 북도안무사(北道按撫使) 겸 병마원수(兵馬元帥)를 거쳐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 병부상서는 지금으로 치면 국방부장관에 해당한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전신민은 두문동 72현과 함께 두 나라를 섬기지 않을 것을 다짐하고 미련 없이 개성을 등지고 남쪽으로 향했다. 

독수정 편액과 마루. 편액 위쪽으로 '고종 28년(1891년) 다시 지었다'는 내용의 상량문이 있다. [사진=이광표]

  그는 천안 전씨였지만 천안을 지나쳐 담양까지 내려갔다. 담양과의 특별한 인연은 없었지만 전신민의 발길을 잡아끈 곳은 무등산 자락이었다. 지금의 담양군 가사문학면 연천리. 전신민의 삶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어 정확하게 추정하긴 어렵지만, 담양에 내려왔을 무렵 그의 나이는 대략 예순을 넘겼을 것으로 보인다. 
  무등산 자락에 자리 잡은 전신민은 1393년경 이곳에 북향(北向)으로 정자를 짓고 독수정(獨守亭)이라 이름 붙였다. 북향으로 정한 것은 고려 수도였던 개성을 향하고자 함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여러 차례 그를 불렀으나 전신민은 한사코 나아가지 않았다. 전신민은 두 나라를 섬기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아침마다 조복(朝服)을 입고 개성을 향해 곡을 하며 절을 올렸다고 한다. 두문동 72현처럼 그는 평생을 독수정에서 두문불출했다.
  독수정이라는 이름은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701~762)의 시구에서 따왔다. ‘백이숙제는 누구인가/홀로 서산에서 절개를 지키다 굶주렸다네(夷齊是何人 獨守西山餓)’라는 구절이다. 독수는 은사 (隱士)의 고절(高節)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전신민의 결의가 지금도 느껴진다.
 

독수정으로 오르는 길.[사진=이광표]


 전신민은 정자를 세우고 난 뒤 ‘독수정 원운(獨守亭原韻)’이란 시를 지었다.
  
    풍진은 아득하고 내 사념은 깊은데(風塵漠漠我思長) 
    어느 곳 운림에 늙은 이 몸 맡길 건가(何處雲林寄老蒼)
    천리 밖 강호에서 귀밑머리 눈처럼 희어졌네(千里江湖雙鬢雪)
    백년 세월, 천지엔 슬픔만 남았구나(百年天地一悲凉)
            ……
    이 청산에 뼈를 묻으려고(卽此靑山可埋骨)
    홀로 지킬 것을 맹세하며 이 집을 지었다네(誓將獨守結爲堂) 

  고려에 대한 그리움이 진하게 배어있는 시다. 그 그리움을 달리 말하면 충의 정신일 것이다. 전신민의 아호는 ‘서은(瑞隱)’이다. 천안 전씨 대동보에는 전신민과 관련해 ‘남하서석산은거(南下瑞石山隱居)’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로 미루어 서은은 ‘서석산(瑞石山)에 숨어 사는 사람’이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서석산은 지금의 무등산이다.
  전신민이 1393년경 지은 애초의 독수정 건물은 사라졌고 1891년 전신민의 후손들이 재건했다. 당시에는 초정(草亭)이었으나 1915년에는 지붕을 기와로 바꾸었고 1972년 중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지금의 정자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이다. 가운데는 한 칸짜리 방이 있고, 마루에 앉으면 멀리 무등산 자락이 눈에 들어온다.  

환벽당은 광주시 북구 충효동에 위치하지만 다리 하나만 건너면 담양군 가사문학면 지곡리다. [사진=이광표]

  애초 독수정은 1393년 그러니까 조선이 건국한 직후에 지어졌다. 이는 독수정이 조선시대 담양지역 누정 건축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마루에 작은 방을 갖춘 남도 특유의 정자 건축의 모델이 되었기 때문이다. 독수정이 절의를 지키기 위해 낙남(落南)한 인물이 지은 공간이라는 점도 각별하다. 담양 지역에 유서 깊은 누정과 원림이 많지만, 충절과 은일의 측면에서 볼 때 독수정은 단연 두드러진다.  
  담양 지역의 은일의 누정 문화는 독수정에서 출발했다. 그것이 하나의 전범이 되어 면앙정(俛仰亭) 소쇄원(瀟灑園) 식영정(息影亭) 환벽당(環碧堂) 송강정(松江亭) 명옥헌(鳴玉軒) 취가정(醉歌亭) 등이 잇달아 조성되었다. 담양의 누정과 원림 문화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빛나는 가사문학의 탄생을 가져왔다. 

가사문학관에 전시된 송순의 면앙집.[사진=이광표]


  전신민의 은거는 낭만적인 은거가 아니었다. 절박한 충의의 발로였다. “호남에 의리 정신의 씨앗을 심고, 독수정이라는 정자를 지어 표상으로 남긴 사람이 전신민이다” “독수정은 호남 충의 정신의 1번지”(김성기, 〈서은 전신민의 독수정과 호남의 충의〉 《고시가연구》 제9집)라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조선시대 호남지역 사림 정신과 선비 정신의 뿌리는 바로 전신민이었고 그 상징 공간이 독수정이다. 
  우리는 흔히 ‘고려 3은(三隱)’을 이야기한다. 고려 말기의 대표적 유학자인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吉再·1353~1419)를 일컫는다. 그런데 담양의 독수정에 올라 전신민의 삶을 떠올려 보면, 나도 모르게 “고려 4은” “고려 4은”이라고  중얼거리게 된다. 
  독수정 가까운 곳엔 환벽당과 취가정이 있다. 두 정자는 행정구역상 광주에 속하지만 여전히 담양의 누정문화권, 가사문학권의 영역에 포함된다. 환벽당은 담양 출신의 김윤제(金允悌·1501~1572)가 낙향하여 1540년에 지은 별서(別墅)이다. 김윤제는 붕당의 와중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이곳에서 책을 보고 시를 짓고 당대의 문인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후학을 가르쳤다. 그 과정에서 발굴한 인물이 바로 정철(鄭澈·1536~1593)이다. 

정철이 선조로부터 하사받은 옥배.[사진=한국가사문학관 제공]


 아버지와 함께 담양에 내려와 지곡리 지실마을에서 지내던 정철은 18세 때인 1563년 무렵 환벽당 앞 창계천에서 물놀이를 하다 우연히 김윤제를 만났고 정철의 재능을 알아본 김윤제는 환벽당에 정철을 들여 공부를 가르쳤다. 정철은 10년을 이곳에서 지냈다. 창계천 건너 식영정을 오가면서 25세 때 성산별곡(星山別曲)을 지을 수 있었다.
  환벽당은 ‘푸름으로 둘러싸인 곳’이라는 뜻이다. 환벽당이란 이름은 서화가인 신잠(申潛· 1491~1554)이 지었고, 마루에 걸려 있는 환벽당 편액은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글씨다. 이름에 걸맞게 환벽당은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상쾌하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자 건물도 군더더기 없이 단정하다. 아 이것이 선비의 삶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환벽당 정자 마루에서 내려다보면 창계천 물길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창계천 너머로는 요즘 지은 한국가사문학관 건물도 보인다. 

환벽당에서 내려다본 창계천. 이 일대는 담양 원림문화의 핵심공간이었다. [사진=이광표]


  취가정은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 김덕령(金德齡·1567~1596)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1890년 후손들이 지은 정자다. 이 일대의 누정 가운데 역사가 가장 짧다고 할 수 있다.
  2001년 11월 문을 연 한국가사문학관은 담양군 가사문학면 지곡리의 창계천변에 위치한다. 무등산에서 발원한 창계천 물길은 가사문학관 앞에서 광주호로 이어진다. 가사문학관 좌우로는 소쇄원과 식영정이 있고 창계천 건너편으로는 독수정 취가정 환벽당이 있다. 한국가사문학관은 그야말로 누정 원림문화와 가사문학의 핵심 공간에 터를 잡았다. 조선시대 수많은 선비 문인들이 오가며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였으며 자신의 절의를 다잡고 더 나은 세상을 꿈꾸었던 곳이다.  
  한국가사문학관은 우리 가사문학의 700년 역사를 확인하고 그것을 현대적으로 전승하고 재창조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이를 위해 국내 가사문학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 보관 연구 전시한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능은 역시 전시가 아닐 수 없다. 전시를 통해 사람들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사문학관 전시실에선 송순(宋純·1493~1582), 정철의 가사와 관련된 자료가 두드러진다. 송순의 글을 모은 면앙집(俛仰集), 면앙정가 관련 자료, 송순이 80세 되던 해 8남매에게 재산(전답과 노비 등)을 분배하는 내용을 담은 분재기(分財記), 정철의 글을 모은 송강집(松江集)과 목판, 정철이 선조로부터 하사받은 은배(銀盃)와 옥배(玉盃) 등. 전국 곳곳에서 수집한 다양한 내용의 가사 자료, 그리고 전통 가사를 기억하고 향유하기 위한 우리 시대의 그림과 서예작품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가사문학관이 소장하고 있는 정철의 송강집 목판.[사진=이광표]


  한국가사문학관은 담양 지역에 머무르지 않고 담양 그 너머를 지향한다. 자료 수집이나 연구 전시 활용에서 담양지역의 가사에 국한하지 않고 국내 가사문학 전체를 대상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가사문학관이 운영하는 프로그램의 면면을 보면 다채롭고 흥미롭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2014년 창간한 계간지 ‘오늘의 가사문학’을 들 수 있다. 주간을 맡고 있는 최한선 전남도립대 교수는 “가사 문학에 관한 열린 광장으로 만들어 가사문학의 부흥과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한 토대로 삼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의 말대로 ‘오늘의 가사문학’은 전문 연구자들과 일반인들이 함께 만나 가사 문학의 의미와 매력을 경험하는 마당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가사문학관은 ‘한국 명품가사 100선’을 발행했으며 한국 가사문학 대상 공모전, 전국 가사문학 학술대회, 전국 가사문학 낭송대회, 랩 페스티벌 등의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최근엔 ‘한국 가사시 100인선’, ‘가사로 쓰는 동화 100인선’을 발간해 가사문학 창작이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가사 문학이 박제화된 고리타분한 전통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문화의 한 장르라는 사실을 웅변하고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나아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도 추진할 계획이다.
  700년 역사의 가사 문학, 500년 역사의 누정 원림문화. 그 본향인 창계천변에서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22년 역사의 한국가사문학관. 이들이 어울려 담양의 문화는 더욱 깊어지고, 넓어지고 있다.
  <이광표 서원대 교수·문화재청 문화재위원>
  후원=담양군(군수 최형식) 뉴파워프리즈마(회장 최대규)
   
참고문헌
1. 국립광주박물관 《담양》 통천문화사, 2015
2. 국윤주 《독수정 명옥헌》 심미안, 2018
3. 조태성 《환벽당 취가정 풍암정》 심미안, 2019 
4. 김성기 〈瑞隱 全新民의 獨守亭과 湖南의 忠義〉 《고시가연구》 제9집, 한국고시가문학회,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