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혼의 재발견 - (1) 광주정신] 75년간 ESG경영한 선각자, 빛고을에 참 바른 기업가 있었다

2021-07-09 05:11
[광주정신] ⑫ 남화토건 최상옥 회장

최상옥 회장

광주의 남화토건은 올해로 창사 75주년을 맞는 중견 건설회사다. 부침이 심한 건설업계에서 보기 드문 장수기업이다. 회사 규모는 크지 않다. 시공능력평가액 1000억원 이상인 전국의 160여 1군 건설업체 중 순위가 155위(2020년 기준 1647억원)다. 아파트를 짓지 않아서 순위가 낮다고 한다. 그래도 신용등급은 A+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신뢰지수’라는 게 있다면 신용등급보다 훨씬 높을 것이다. 광주사람들에게 남화토건은 정도(正道)기업으로 깊게 각인돼 있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세워져 다른 많은 기업들처럼 곡절 많은 한국 현대사의 격랑을 헤치고 왔지만 불법이나 비리로 문제가 된 적은 한 번도 없다. 믿기지 않을 정도다.

한 지역의 정신가치는 그 지역의 기업과 무관한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기업은 이윤추구가 최우선의 가치이므로 그동안 우리 취재팀이 찾고자 했던 광주의 정신가치들, 예컨대 불의(不義)에 대한 저항, 절의(節義), 예향(藝鄕)으로서 기질 등과 성격이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달라진 기업의 위상을 생각한다면 기업의 관점에서 광주정신의 요체를 짚어보는 일 또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남화토건에 주목한 이유다. 광주 출신 재벌그룹이나 대기업도 많지만 남화토건에서 광주의 기업적 정신가치라 할 만한 흔적들을 보았던 것이다.

“기업의 이윤은 倫理 안에 존재해야”

창업주 유당 최상옥(裕堂 崔相玉‧1927∽2020년)은 평생 정직과 신용을 삶의 좌표이자 경영의 원칙으로 삼아온 사람이다. 손해를 볼지언정 반사회적인 일을 하지 않았고, 기회주의와 적당주의를 배격했다. “기업의 이윤은 사회규범과 관습, 윤리와 도덕성의 범위 안에 존재해야 한다”고 했다. 반세기 전에 이런 생각을 가졌으니 실로 혜안이 아닐 수 없다. 요즘 나라를 막론하고 기업의 보편적 화두가 된 ESG(환경‧사회‧지배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최 회장은 한 신문과 인터뷰에서 “욕심이 앞서면 무리하게 되고 허영심이 앞서면 내실을 기하기 어렵다. 나만 생각하지 말고 가족과 사회를 함께 생각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말했다(무등일보, 2015년 5월 15일). 이 한마디에 그의 경영철학이 모두 담겨있다.

1998년 최 회장은 대한건설협회로부터 ‘위대한 건설인상’을 받았다. 건설협회가 창립 50주년을 맞아 최 회장과 현대건설 정주영(1915∽2001년), 삼환기업 최종환(1925∽2012년), 동방건설 이양성, 극동건설 김용산(1922∽2007년) 회장 등 원로 건설인 5명에게 준 상이다. 건설인으로서 최 회장의 위상을 가늠케 한다. 당시 한 신문은 그를 “일밖에 모르며, 투명경영을 실천해온 지방건설업계의 산 증인”이라고 소개했다(문화일보, 2007년 8월 29일).

건설업계의 그랜드 슬램

남화토건은 1984년 난공사로 유명한 전남 진도군 서거차항 건설공사를 7년에 걸쳐 완공했다. 그 공로로 최 회장은 석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이어 2007년에는 건설유공자로 은탑산업훈장을 추가했다. 친동생인 최상준 부회장(崔相俊‧84)도 2000년 동탑산업훈장(납세유공자)에 이어 2014년 금탑산업훈장을 받음으로써, 남화토건은 광주 전남 건설업체 중 유일하게 금, 은, 동, 석탑훈장을 다 받은 기업이 됐다. 건설업계의 그랜드 슬램을 이룬 셈이다.

남화토건은 업계에서 제값 받고 제대로 공사하는 기업으로 잘 알려졌다. 회장 자신이 공사를 직접 챙긴다. 1981년 전남 무안군보건소를 증축해 기증한 적이 있다. 공사가 끝나갈 즈음 최 회장이 현장에 가보니 천장이 잘못돼 줄이 맞지 않고 거칠었다. 회장이 직접 그것을 뜯어내고 다시 시공하게 했다. 그는 “공사가 지연되고 손해가 날지라도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 않으면 두고두고 마음에 걸려 지워지지 않는다”고 했다(최상옥, 『지성의 행로』, 2000년).

‘지성(至誠)의 행로’

남화토건에선 ‘지성의 행로’가 회사의 모토다. ‘지성’(知性)이 아닌 ‘지극정성’(至極精誠)의 줄임말 ‘지성’(至誠) 말이다. 기업으로서 남화토건의 행태와 문화는 이 한 단어에 집약돼 있다. 누구든 지성으로 대하다보니 갑질 시비가 없다. 차입금도 없고 어음도 거의 발행하지 않는다. 협력업체 공사대금도 현금으로 준다. 임직원을 존중하고 대우가 좋아 노사분규도 없다. IMF 위기 때도 직원 해고 없이 견뎌냈다. 2012년 광주‧전남지역의 건설업체로는 처음 코스닥 상장에 성공했을 때는 주식의 20%를 직원들에게 ‘우리사주’로 내주었다.

광주의 콘크리트업체인 ㈜서산의 염홍섭 회장(93)의 말이다. “최 회장과 친구로 지내면서 내가 많이 배웠다. 그분은 사업으로 돈을 벌면서도 남에게 욕을 안 먹어. 정말 어려운 일이거든. 약속한 일은 꼭 지키고 하나하나가 완벽해요. 그러니 주변에 귀감이 되지. 난 원래 장례식 때 장지까지 안 가는데 작년 최 회장 장례 때는 갔어요. 너무나 좋은 친구였거든...”
 

최상옥 형제(왼쪽 최상옥 회장, 오른쪽 동생 최상준 부회장)

형제의 友愛 속에 꽃 핀 기업

남화토건은 최상옥, 상준 형제의 우애(友愛) 위에서 꽃핀 기업이다. 재벌그룹이나 기업에서 흔히 목격되는 가족 간 갈등과 암투와는 대조적이다. 최상옥 회장은 고향인 전남 화순군 화순읍 벽라리의 소농(小農) 집안에서 3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화순공립보통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하나, 집안 형편 때문에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목포(木浦)의 한 인장(印章)가게에 취직해 잠시 도장 파는 일을 하게 된다. 상옥은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뛰어났다고 한다.

이후 일본인 가와무라(川村)에게 목수 일을 배운다. 그가 지금도 ‘유일한 스승’으로 여기는 가와무라는 일본 건축공과학교 출신으로 당시 화순 복암역사(驛舍) 신축공사를 책임지고 있던 도편수였다. 가와무라는 상옥의 손재주와 성실함에 반했다고 한다. 그 밑에서 목공일은 물론 기능공들의 출퇴근 관리와 경리일까지 맡게 되고 이게 뒷날 남화토건 창업의 기초가 된다.

동생인 상준은 형과는 11살 터울이다. 어려서부터 형이 하는 건축일을 보면서 자랐던 그는 광주공고 건축과와 전남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1964년 남화토건에 평사원으로 입사한다. 밑바닥 건설현장을 충분히 경험한 후 상무, 전무, 부사장을 거쳐 29년 만에 대표이사가 된다. 최상옥 회장은 65세 때인 1991년 동생 상준에게 경영권을 넘긴다. 대표이사로서 상준은 IMF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한다. 최상옥 회장의 장남인 최재훈 남화토건 사장(72)은 “아버님은 숙부님을 전적으로 신뢰했기에 그런 결정을 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는 부러(일부러) 최상준 부회장에게 물었다. 아무리 우애가 좋아도 가끔 다툴 때도 있지 않았겠느냐고. 최 부회장은 “한 차례도 없었다”고 했다. “형님이 잘 하시니까, 다툴 일이 없고, 나 또한 혼날 짓을 안하니까.” 40년간 최상옥 회장을 보좌한 조영환 전 전무(현 유당문화재단 사무국장)는 “두 형제분과 최재훈 사장, 세 분이 최종 논의를 하는데 늘 서로 양보 한다”고 귀띔했다. 신뢰와 양보가 우애와 화합의 비결이었던 셈이다.

동두천 駐韓美軍 기숙사 신축공사

1960년대 남화토건은 경기도 동두천에 있는 미군부대에 기숙사 4동을 신축하는 공사를 180만 달러에 수주한다. 연고도, '빽'도 없는 전라도 회사가 굴지의 업체들을 제치고 어떻게 수주를 했을까. 미국엔 로비가 통하지 않았고, 입찰도 최저가 방식이 아닌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방식으로 진행했기에 오히려 수월했다고 한다. 이후 1970년대 남화토건은 주한미군을 상대로 한 군납사업에 뛰어들면서 급성장한다,

1977년 신창건설을 흡수합병해 사세를 키웠고, 1992년 철강재설치공사업에 이어 조경공사업 면허를 취득해 사업영역도 넓힌다. ISO 9001 품질시스템 인증을 받아 건축 토목공사에서 최상의 품질관리체제도 갖춘다. 최 회장은 건설사들이 아파트 붐으로 큰돈을 벌 때도 실수요 외에는 토지를 사고 팔지 않았다. 1990년대엔 사업 다각화를 추진해 남화개발, 남화산업, 한국케이블TV 광주방송, 한국씨엔티 등을 설립하고, 2000년대 들어 남화토건과 균형을 이루는 계열사 체제를 갖추게 된다(‘남화 70년사’, 2016년).

아주 광주적인 기업정신의 창출을

최상옥 회장은 사회공헌에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이뤄진 사회공헌 활동치고 그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게 없을 정도다. 고향 화순에 여중학교를 설립하는 데 부지를 사서 제공했고, 광주에 서석중고교를 세워 신흥 명문고로 키웠다. 도서관과 미술관을 지어 기부했고, 심지어는 광주갱생보호회를 통해 15년 동안 결혼식을 못 올린 140쌍의 커플들에게 합동결혼식과 함께 60만~100만원씩이 담긴 새생활저축통장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14년 동안 대한검도회 회장을 지냈다. 대기업도 아닌 지역의 작은 기업주가 스포츠, 그것도 비인기종목을 맡아 그렇게 오래 봉사한 것도 전례가 없는 일이다. 세계검도선수권대회를 유치해 1988년 5월 서울에서 열리기도 했다.

최상옥 회장은 2016년 남화토건 70주년 기념식에서 임직원들에게 “미래를 준비하고, 우수한 경험과 노하우를 디딤돌 삼아 지역사회로부터 더욱 신뢰받는 기업으로 거듭날 것”을 당부했다. “이제부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실+α’이며, α는 최고의 경쟁력이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능력을 키워가자”고 말했다. 최 회장은 떠났지만 그의 정신과 경영철학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남화토건에서 ‘아주 광주적인’ 기업정신과 가치의 발아(發芽)를 기대해본다.
 

정주영, 조정구, 최상옥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