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기고]정비사업, '흑묘백묘'의 지혜가 필요할 때
2021-06-26 13:00
주택 정책 목적은 '빠르고 질 좋은 주택 공급'하는 것
목적 달성을 위한 방법 고민할 때
목적 달성을 위한 방법 고민할 때
이후 집권한 덩샤오핑은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공산주의 이념을 교조주의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닌, 자본주의의 장점을 취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여기서 그가 내세운 기치가 바로 실용주의 노선의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이다. 즉,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인민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으면 그것이 제일이다는 것이다. 이후 중국은 40년간(1980~2019년) 연평균 9.2%에 이르는 고도성장을 통해 지금의 강대국이 될 수 있었다.
시각을 돌려 지금 우리나라의 주택공급 정책을 보자. 공공주택사업, 도심 공공주택복합사업, 공공재개발, 공공직접시행 정비사업... 신도시부터 기성시가지까지 온통 ‘공공’이 빠지지 않고 있다.
현 정부에서 정비사업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리와 투기의 온상이자 부동산 가격 불안의 원흉으로 비난 받고 있었다. 하지만, 직주근접 수요 증가 속 주택시장 불안이 심화되자 정부는 작년부터 공공이 주도하는 정비사업 방식을 연달아 발표하고 있다.
이런 접근의 저간에는 공공이 주도하면 민간 정비사업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대폭 개선하여, 신속하고 ‘정의로운’, 그러면서도 민간사업에 버금가는 품질로 사업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이런 믿음은 2.4대책 내용과 여당 의원이 발의한 제안이유 등에 녹아있다.
정부의 정책 방향은 얼핏 들으면 매우 바람직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정부의 믿음은 여러모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
우선 세 가지만 따져보자. 먼저 공공이 정비사업을 주도하면 ‘빠르게’, ‘질 놓은’ 주거환경을 조성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주택을 충분히 공급하고 세입자를 포함한 사회적 약자들의 권익도 충분히 보호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정비사업 경험들을 보면 꼭 그렇지는 않을 수 있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민간이 시행해도 1년 남짓 기간 내에 인허가 과정을 완료한 사례가 있는 반면, 공공이 시행해도 15년째 진행 중인 사례도 있다. 후자의 대표적인 사례는 SH공사가 시행 중인 세운 4구역으로, 소유자와 세입자 모두 불만이 매우 큰 곳이다.
이 밖에도, 권리관계가 매우 복잡하거나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가 연계된 곳은 공공이 시행하게 되면 오히려 사업이 더 지연될 가능성이 크다. 제한된 사업비와 분양·임대 가능 물량으로 모든 세입자, 영세상인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주지 못할 가능성 또한 매우 크다. 정부 발표대로 기부채납 면적을 줄이고 고밀로 주택공급을 하게 되면 주거환경 개선 정도도 상대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두 번째로, 민간 정비사업은 정말로 조합원 배만 불리는 이기적인 사업일까? 일반인들이 흔히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정비사업, 특히 재개발사업에서는 용적률 인센티브를 대가로 큰 규모의 공공기여를 하고 있다. 전체 토지면적의 15% 이상을 도로, 공원, 학교 등을 위한 기반시설로 기부채납하는 곳도 많다.
기본적으로 세입자를 위한 임대주택을 15% 건설해야 하고, 용적률을 추가로 획득하기 위해서는 임대주택을 추가로 건설해야 하기에 전체 주택에서 임대주택 비율이 20%를 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공공성’을 강화하기 위해 ‘공공재개발’ 사업을 도입했으나, 이 정도면 공공이 시행하는 재개발사업과 공공기여 측면에서는 사실상 큰 차이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일정 조건을 만족하는 세입자는 주거이전비(2020년 4인 가족 기준 2133만원), 이사비를 지금 받음과 동시에 임대주택 입주권이 주어진다. 이 사업이 과연 소유자들의 배만 불리는 이기적인 사업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소유주들이 정부의 인센티브 대비 공공기여 요구가 과다하다고 생각해 사업 자체가 무산되거나 장기간 교착상태에 빠질 가능성도 크다. 무엇보다 정부가 소유주들에게 인센티브로 제시한 ‘추가수익 보장’ 조건은 금액 산정 등에 있어 여러 문제가 있어 향후 많은 논란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최근 'LH사태'이후 공공에 대한 불신이 커진 상황에서 공공에게 시행 권한을 이양하는 것에 대한 상당한 거부감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사업이 추진되지 않으면 주택공급과 주거환경 개선이라는 정책 목적 달성 자체가 불가능해지게 된다.
매매와 임대차를 가리지 않고 주택가격 급등이 이어지고 있는 현 시점에, 우리는 정비사업을 통한 주택공급 정책을 근본적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정비사업에서 ‘공공’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할까? 인허가를 넘어 직접 시행이 필요할까? 그렇다고 하면 득과 실은 무엇일까?
정비사업 중에서도 주택 재개발에 초점을 맞춰보자. 이 사업의 핵심 목적이 주거환경 개선과 포용적 주택공급이라고 한다면, 이 목적을 달성하는데 있어 굳이 공공이 직접 시행할 필요가 있을까?
최근 서울시에서 제시한 ‘공공기획’ 과정과 심의를 통한 인허가만으로도 정책 목적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2019년 서울시에서 시범사업으로 추진했던 도시·건축 혁신사업은 민관 협력을 통해 신속하면서도 공공성 높은, 그러면서도 사업자와 공공이 윈윈하는 방식으로 사업추진이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정비사업은 기본적으로 사유지를 대상으로 하는 사업이다. 소유자들 다수가 동의하지 않으면 사업 자체가 추진될 수 없다. 인센티브 대비 지나친 공공기여를 요구한다거나, 기반시설 대신 공공주택이 많이 공급되어 주거환경 개선 효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것 같다면, 게다가 가뜩이나 공공에 대한 불신이 큰 상황 속에서 시공사 선정을 제외한 모든 시행 권한을 양도해 달라고 한다면, 다수의 소유자들은 공공주도 방식을 선호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사업이 추진되지 못하고 정책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것이다. 공공주도 방식은 정책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 중 하나이지 목적 그 자체가 아니다.
현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흑묘백묘'의 지혜다. 공공이 하든 민간이 하든, 주거환경 개선하고 주택공급 충분히 하면 그것이 제일 아닐까? 민간이 시행해도 사업성이 양호한 곳에서, 그리고 공공에 대한 반감이 큰 상황 속에서, 굳이 억지스럽게 공공이 시행하겠다고 할 필요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