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용진의 ‘이의 異意있습니다’]백기완. 벌써 그의 사자후(獅子吼)가 그립다.

2021-02-15 16:11

“노동해방이 뭐야! 노동해방이 뭐냐고!”

벌써 30년전이다. 1991년 5월 1일 연세대에서 열린 세계노동절기념 노동자대회에 연사로 초청된 백기완은 청중을 돌아보며 호통치듯 물었다. 갑작스런 그의 질문에 장내는 일순 침묵에 잠겼다.

“노동해방은 노동자가 권력을 먹갔다는 거야. 쩨쩨하게 월급 한두푼 올려달라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권력을 쥐고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서는 것 그게 노동해방이야”

이북사투리가 간간히 섞여 있던 그의 연설에는 청중을 휘어잡는 호소력이 있었다. 함께 울고 웃다가도 일순 모든 이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심지어 그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한 가지 주제에 몰아넣을 수 있는 마력도 있었다.

마치 주문처럼 늘상 외쳐대는 구호였지만 막상 설명하려면 말문이 턱 막히던 골치 아픈 개념이나 용어도 가슴팍에 팍 꽂히듯 쉽게 풀어내는 것도 그의 능력 중 하나였다.

그러기에 구(舊) 소련공산당의 붉은 깃발을 연상시키는, 그래서 빨갱이들의 은어같은 ‘노동해방’이라는 말이 사실은 노동자들의 정치적 자각을 의미한다는 것을 그처럼 쉽게 풀어낼 사람은 없었다. 국민의 절대 다수 차지하면서도 기득권 세력에 밀려 정치적 영향력이나 발언권을 가져본 적 없는 노동자가 그 정치적·사회적 가치와 무게를 자각하고 현실에서 구현해 나가는 것이 진짜 ‘노동해방’이라는 것을 그처럼 쉽게, 한 순간에 깨우쳐 줄 사람이 또 있을까?

생전의 고 백기완 민중운동가. 사진은 2011년 쌍용차 사망노동자 추모집회 당시 모습[사진=장용진 논설위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인 유홍준 교수는 한 방송에 나와 백기완을 일컬어 ‘조선의 3대 구라’라고 꼽은 것도 아마 그 때문인지 모르겠다. “조선에는 ‘3대 구라’가 있는데, 백구라, 방구라, 황구라이다”라고 말이다. 소설가 황석열이 ‘황구라’고 7·80년대 유명한 사회사업가였던 방동규가 ‘방구라’, 그리고 백기완이 ‘백구라’다.

우리말 사전을 찾아보면 ‘구라’는 ‘거짓말을 맞추어 부르는 을 일종의 비속어’라고 기재돼 있다. 일부에서는 일본어로 알고 있지만 일본어는 아니라고 한다.

사전에서는 ‘거짓말의 비속어’라고 정의하고 있지만 우리의 일상에서 쓰임새를 보면 ‘구라’는 단순히 거짓말이라는 의미보다 ‘약간의 허풍과 상상이 가미된 이야기’ 정도로 쓰이는 듯하다. 그러니가 ‘조선의 3대 구라꾼’은 달리 말하면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재담군’ 정도로 정의하면 될 것 같다.

대한민국 국가대표 축구팀을 ‘월드컵 4강’의 신화 위에 올려놓은 거스 히딩크 감독이 백기완을 일컬어 ‘한국 최고의 축구 이론가’라고 평가했었다는 소문이 있는 것을 보면 그의 ‘구라’ 실력은 조선을 넘어 ‘글로벌’한 수준에 이르렀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한때 대학가를 주름잡던 연설가로 백기완을 빼놓을 수 없으니 어느 모로 보나 그를 ‘조선의 구라’로서 모자람은 없을 듯 하다. 90년대까지 대학가에서 유행했던 ‘초정강연회’에 그를 빼놓을 수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지 싶다.

요즘이야 유튜브 같은 것도 있으니 굳이 연설 같은 것을 들으러 모일 필요도 없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유명 재야인사들의 초청강연회는 중요한 행사였다. 초청강연회를 연다면 단연 대표주자는 고(故) 문익환 목사와 백기완 선생이었다. 주로 대학가의 운동장을 빌려서 행사를 열었는데, 1만명은 기본이고 10만명을 넘기는 경우도 예삿일이었다.

[사진=민주화기념사업회]


특히 그가 민중후보로 나섰던 1988년과 1992년의 대학로 유세는 단연 압권이었다. 3김이라는 유력후보들에 밀려 군소후보 취급을 받았지만 혜화동 로터리에서 이화동 사거리까지를 가득 매운 백만청중들은 민중후보를 절대 무시하지 말라는 경고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가 만들어지는 만큼 그 자리를 빌어 이른바 ‘민중예술인’들의 작품이 발표되기도 했는데, 1988년 대학로 유세에서는 박노해 시인의 ‘민중의 나라로’가 처음 발표됐고 1992년 대학로 유세에서 박노해의 시에 곡을 붙여 만든 민중가요 ‘민중의 노래’가 발표됐다.

그러니까, 백기완은 단순히 이야깃꾼이 아니라 민중운동권이 활동할 수 있는 큰 마당을 열어주는 역할을 했던 셈이었다. 오늘 날 진보정당들의 시초이자 맹아가 1988년과 1992년 ‘민중후보 백기완 선거운동본부’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생각하면 ‘활동의 장’ 정도가 아니라 그 스스로가 탄탄한 발판이 되어주는데 주저함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랬던 그가 15일 새벽 영면에 들었다. 숱한 사람들의 20대를 뜨겁게 달구었던 영웅이 또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군중을 들었다 놓았다 하던 그의 연설도 이제 오래 된 영상 속에서나 찾을 수 있게 됐다.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 질지 모른다

이미, 안그래도 없는 살림을 들어먹은 두 차례 대선출마로 힘들게 초석을 놓았던 진보정당 운동은 어느 새 갈 길을 잃고 헤멘지 오래다.

오랜 시간 병석을 지키다 오늘 세상을 떠난 백기완. 벌써 그의 사자후가 그리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