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의 新아방강역고-17] 일본이 중국에 조공 바치던 조선을 구해줬다?
2021-01-13 07:00
식민지근대화론의 핵심에 대한 팩트 핵폭격
조공은 되로 주고 말로 받는 남는 '대박무역'
일본은 16세기 중엽까지 한국에 조공을 바쳤다
조공은 되로 주고 말로 받는 남는 '대박무역'
일본은 16세기 중엽까지 한국에 조공을 바쳤다
◆식민지근대화론의 핵심에 대한 팩트 핵폭격
종일매국 식민사관 역사 인식의 핵심, ‘식민지근대화론’의 뿌리는 '조공'에 대한 개념 조작과 역사 왜곡작업부터 시작됐다. 마치 중국에 '삥(조공)'이나 뜯기던 조선을 ‘대일본제국’이 해방시켜 줬다는, 교활하고 능란한 역사 왜곡과 추악한 식민사관에 필자를 포함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직도 알게 모르게 중독돼 있다.
흔히들 ‘조공’하면, ‘상납’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많다. ‘조공’을 사대주의의 징표라 하여 수치스럽게 여기거나, 괜한 역사적 열등감에 빠져드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꽤 있다.
그러나 이는 일제 식민사관에 기반한 왜곡된 역사교육이 남겨준 인식 상의 오류이다. 조공은 일방적인 상납이 아니라 물물교환 형식의 정부주도형 무역이다.
국경 지역에 개설된 시장에서 행해지는 변경무역이나, 소설 『상도』에서 볼 수 있는 조선시대 억상정책 질곡을 뛰어넘은 민간 거상들의 활약이나, 공양미 삼백석에 인신공양물이 되어 인당수에 빠져 죽는 『심청전』에서 나오는 밀무역 등, 가뭄에 콩 나듯 보여지는 이같은 민간 무역행태 이외에는 조공무역이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종일매국 식민사관 역사 인식의 핵심, ‘식민지근대화론’의 뿌리는 '조공'에 대한 개념 조작과 역사 왜곡작업부터 시작됐다. 마치 중국에 '삥(조공)'이나 뜯기던 조선을 ‘대일본제국’이 해방시켜 줬다는, 교활하고 능란한 역사 왜곡과 추악한 식민사관에 필자를 포함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직도 알게 모르게 중독돼 있다.
흔히들 ‘조공’하면, ‘상납’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많다. ‘조공’을 사대주의의 징표라 하여 수치스럽게 여기거나, 괜한 역사적 열등감에 빠져드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꽤 있다.
그러나 이는 일제 식민사관에 기반한 왜곡된 역사교육이 남겨준 인식 상의 오류이다. 조공은 일방적인 상납이 아니라 물물교환 형식의 정부주도형 무역이다.
국경 지역에 개설된 시장에서 행해지는 변경무역이나, 소설 『상도』에서 볼 수 있는 조선시대 억상정책 질곡을 뛰어넘은 민간 거상들의 활약이나, 공양미 삼백석에 인신공양물이 되어 인당수에 빠져 죽는 『심청전』에서 나오는 밀무역 등, 가뭄에 콩 나듯 보여지는 이같은 민간 무역행태 이외에는 조공무역이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조공은 되로 주고 말로 받는 남는 '대박무역'
한 마디로 조선시대 무역형태의 주류는 조공 무역이었다. 조공국에서 조공을 보내면 사대국에서는 답례로 사여(賜與)를 보낸다. 사여품이 조공품보다 몇 배 많은 게 원칙이었다.
더욱이 조공국에서 임의로 값을 정하는 조공국-사대국 간의 무역 불문율에 말값은 조선에서 정했는데, 상등마 기준 말값은 포 500필이다. 조선은 여진족등 북방 야인에게서 말을 조공 받았고 상등마 기준 포 45필을 사여품으로 지급했다.(1)*
즉, 조선은 45필을 사여로 지급하고 상등마 말 한 마리를 조공받아 이를 다시 명 나라에 조공, 500필의 사여를 받았다. 조선은 45필을 투자하여 500필을 벌었으니, 투자금의 10배가 넘는 폭리를 취한 셈이다.
예로부터 말로 주고 되로 받는 게 남는 장사라 하지만, 조공(2)*은 조선 입장에서 되로 주고 말로 받는 '대박 무역'이었다.
그래서 조선은 조공을 1년에 3번 보내던 것을 1년에 4번 바칠 것을 요청했으나, 명 나라는 월남(베트남)처럼 3년에 1번만 보내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명 나라 멸망의 주요 원인의 하나는 과도한 사여품 방출로 인한 국고의 탕진이었다.
중국은 책봉 관계(상명하복관계가 아닌, 의례적인 외교형태)에 있는 나라에 대해서만 조공무역을 허용했다. 중국적 조공질서의 동심원 안에 들어온 조선(매년3공)과 유구(琉球,지금의 오키나와 격년1공), 월남(3년1공)은 중국과 가장 밀접한 '이너서클'의 일원이었다.
반면, 일본은 극히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는 동아시아 제국 중, 특히 조선과 비교하며 중국에 조공을 바치지 않은, 중화질서 밖에서 자유롭게 활동했던 유일한 나라인 것처럼 자국의 교과서에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일본이 그렇게 하려고 한 게 아니라 그렇게 된 것이다.
중국과 조공무역을 하지 않더라도 일본은 왜구(일본에서는 왜구를 ‘민간무역업자’라고 미화하여 부름)의 눈부신 활약(?)을 위시해 유구를 통한 중개무역, 네덜란드와의 교역 등으로 무역수요를 충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16세기 중엽까지 한국에 조공을 바쳤다
일본은 고려제국의 신하 나라로서 중국에 조공은 하지 않았지만, 고려에 조공은 끊임없이 바쳤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20여 차례 서술됐다.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室町, 1336~1573년)의 역대 쇼군들과 다이묘들은 조선에 대해서도 상국으로 경칭하면서 16세기 중엽까지 조공을 바쳤다. 그 횟수는 약 200회로 추산된다.
일본 역사상 가장 강력한 쇼군으로 유명한 제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満,1358~1408년)부터 제4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足利義持,1408~1429년),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 1449~1473년)를 거쳐 제12대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義晴, 1522~1547년)까지, 무로마치 막부의 역대 쇼군들은 조선 제3대 군주 태종(1400~1418년), 제4대 세종(1418~1450년), 제7대 세조(1455~1468년), 제9대 성종(1469~1494년)과 제11대 군주 중종(1506~1544년)에 조공한 내역과 함께 보낸 서한의 내용들이 『조선왕조실록』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중 『성종실록』과 『중종실록』의 기록을 대표적인 예로 들겠다.
일본 국왕(쇼군)이 보낸 사신이 서계와 조공을 바치다.
일본 국왕(日本國王) 회수납정소 이세수 정친(政親)이 보낸 입도등이 와서 공물을 바쳤다. 서계에 이르기를,
"정친은 삼가 글을 조선국 의정부 합하(閤下)에게 바칩니다. 공손히 바라건대 나라가 크게 평안해서 금상 황제(今上皇帝 성종)의 어위(御位)가 오래도록 가소서! 폐하께서는 공손히 덕이 건곤과 일치하였고(중략···) 바라옵건데 '대국(大國 조선)'(3)*의 남은 힘으로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올리는 물품은 면주 3000필, 면포 5000필, 백저포 1000필, 쌀 50-00석이니, 자비로 살피소서. 조공(방물)은 별도로 별폭에 담았습니다. 오직 우리나라의 태평을 거두고 더 나아가 저희가 번신(藩臣)으로서의 충성된 공훈을 세우기를 빕니다." -「성종실록」 1470년 성종 1년 8월 24일
"일본 국왕전(日本國王殿)의 중[僧] 대원(大原)은 거듭 머리를 조아리고 백 번 절하며 말씀드립니다. 우리 성문 신무하신 금상 황제 폐하(今上皇帝陞下; 중종)께서 즉위하신 이래 만물들이 제 스스로 뜻하는 대로 되어지며, 비가 와야겠다 하면 비오게 되고 볕이 나야겠다 하면 볕이 나게 되었습니다.(중략) 금상 황제 폐하(중종)께서 삼왕(三王)의 위에 있으며 만국(萬國)을 순박해지게 하시므로, 소승은 조선에 와서도 국은(國恩)을 입었고, 노성한 대신들과도 의를 맺게 되었습니다." 「중종실록」 1522년(중종 17년) 6월 11일
참조로 조선이나 중국에서는 ‘쇼군’ 을 ‘일본국왕’이라고 불렀는데, 메이지 유신(1868년) 이전에는 소위 ‘천황 ’이 아닌 쇼군이 일본의 최고 실력자이고, 대외적인 국가대표기관이었다.
이처럼 일본 역대 쇼군들은 조공 표문(表文; 신하가 황제에게 바치는 공문형식)에서 역대 조선군주를 황제로, 조선을 상국 또는 대국(大國), 또는 대방(大邦)이라 경칭했고ㅡ 자국을 번신(藩臣) 또는 누방(陋邦)으로 비칭했다.
일본이 조공을 자주 적극적으로 조선에 바친 실리적 목적은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실리 무역, 조공품보다 4배 많은 조선의 사여품의 방출을 노린 것이다. 실제로 조선도 명나라와 같이 4배의 사여품을 방출하여 재정에 막대한 손상을 입었다.
중국과 조선, 류큐를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일본을 주로 ‘왜(倭)’또는 ‘일역(日域)’으로 칭해왔다. 왜라고 부르는 밑바닥에는 일본을 왜구의 본거지로 폄하하는 어감이 배어 있었고, 일역이라 칭하는 이면에는 일본을 중국적 세계질서의 동심원 내 멤버로 함께하기에는 부적절한, ‘국가’로서의 자격에 미달하는 ‘지역’으로 보는 시각이 깔려있었다.(4)*
자주독립의 역사를 자부하여온 일본은 사실상, 동아시아 국가사회에서의 아웃사이더 내지 왕따였다.
◆◇◆◇◆◇◆◇각주
(1)*「태종실록」 1400년(태종 1년) 10월 3일 기사와 『세종실록」 1425년(세종 8년) 1월 7일 기사 참조
(2)*원나라의 고려복속 초기, 청나라의 조선 침략 (병자호란)시 고려와 조선의 여인을 조공품의 일종으로 공녀貢女로 바칠 것을 강요했던 적이 있으나 특수한 시기 특수한 경우에 지나지 않았다. 이걸 일제와 식민사관 지금의 일본 근대화 공헌론의 뉴라이트 종일매국세력은 고려와 조선의 중국에 대한 상시적 상납으로 왜곡 조작 유포해왔다.
(3)*欲蒙大國之餘力, 所望物件, *여기서도 국사편찬위원회는 '대국'을 '귀국'으로 살짝 변조하고 있다. -도대체 어느 나라 국사편찬위원회인가?
(4)*무궁화 나라 부상(扶桑, 일본의 옛 국호이자 무궁화(Hibiscus syracus)와 같은 과·목·족·속의 식물 Hibiscus mutabilis) 일본이 한국을 근역(槿域)무궁화 지역으로 조작한 목적은 무궁화의 한국의 나라꽃으로 신분세탁 과정을 통하여 한국병탄과 내선일체 작업의 매개체로 삼으려는 제국주의 책략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목적외에도 한국과 중국, 유구 등 동아시아 주변 국가가 자국을 국가도 아닌 지역 ‘일역(日域)’으로 불러왔던 수모에 대한 복수의 의미도 적잖게 담긴 것으로 분석된다. 강효백, 『두얼굴의 무궁화-국가상징 바로잡기1』, 2020. 99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