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故 이세기, 시진핑과 인연도 남달라…中 관영매체 "韓 최고 중국통"

2020-11-24 22:46
향년 85세, 24일 숙환 별세…27일 발인
장례, 한·중친선협회장으로 치를 예정
고인, 시진핑 저장성 서기때 인연 맺어
제주 '서복기념관' 설립, 한·중 친선강화

이세기 한·중친선협회장이 24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사진=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중국통(通)으로 한·중 친선에 앞장섰던 이세기 국민의힘 상임고문이 24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5세다.

고인을 형용하는 수식어는 중국통, 4선 의원, 전두환 정부 국무위원, 교육자 등 다양하다. 이 중 고인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는 ‘중국통’이다. 지난 2008년 8월 16일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고인에 대해 “한국 최고의 ‘중국통’”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1936년 경기도 개풍군에서 태어난 고인은 8·15 광복 이후 월남해 부산 동아고등학교, 고려대 정경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고인은 고대 재학시절 1960년 ‘4·19 혁명’의 도화선으로 평가받는 ‘4·18 고대 학생 의거’ 선언문을 낭독, ‘4·19 혁명’을 주도하기도 했다.

고려대 대학원, 일본 도쿄(東京)대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고려대 정경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부임하며 교육자 생활을 시작했고, 김상협 고려대 총장의 비서실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고인은 전두환 정권 출범 이후인 1981년 민주정의당을 창당하면서 정치계에 입문했다. 제11대 국회의원 총선거(총선)에서 서울 성동구 지역구에 출마해 당시 조덕현 한국국민당 후보와 동반 당선됐다.

1985년 제12대 총선에서도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당선, 2선에 성공했다. 1988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3선에 도전했지만, 강금식 평화민주당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하지만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는 민주자유당으로 출마해 득표율 45.06%를 기록하며 3선에 성공했다. 1996년 제15대 총선에선 신한국당 소속으로 나와 득표율 44.26%로 4선 의원이 됐다.

이후 제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 지역구(서울 성동구) 5선에 도전했지만,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 밀려 낙선했다. 제17대 총선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5선에 재도전했지만 실패했다.

고인은 2002년부터 한·중친선협회장으로 활동하며 정치권에서 대표적인 ‘중국통’으로 불렸다.
 

이세기 전 통일부 장관(왼쪽)이 지난 9월 17일 서울 중구 더플라자호텔에서 열린 전직 통일부 장관 초청 간담회에서 이인영 통일부 장관과 건배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현재의 통일부인 국토통일원 장관이었던 1985년 인도네시아 반둥회의에서 우쉐첸(吳學謙·1921~2008년) 당시 중국 외교부장을 만난 것을 시작으로 중국 지도자들과 많은 관계를 맺었다. 고인은 1985년부터 1987년까지 국토통일원 장관과 체육부 장관을 역임했다.

고인은 후진타오(胡錦濤) 전 중국 국가주석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도 인연이 깊다.

1998년 후 전 주석이 당시 국가부주석 자격으로 4박 5일간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한국 국회의원 중 유일하게 개별 면담한 인물도 고인이다.

고인과 시 주석의 인연은 시 주석이 저장(浙江)성 서기였던 2005년부터 시작됐다. 고인은 당시 시 주석과 만남에 대해 “중국 저장성 닝보(寧波)에 강연을 하러 갔다가 소비품박람회에서 시 주석을 만났다”고 설명한 바 있다.

고인은 “나도 외빈으로 참석했는데, 내게 시진핑을 소개하는 사람이 없어 대기실에 직접 찾아가 인사를 했다”면서 “얘기를 나누다 행사장 단상으로 올라갔는데, 다른 사람들은 시진핑 곁에 못가고 나만 자연스럽게 나란히 걸었고, 내가 시진핑과 아주 친한 것처럼 보였다”라고 했다.

특히 시 주석이 행사 이후 고인을 찾아와 “곧 한국에 갈 것”이라고 말했고, 이에 고인은 “서울에서 한잔합시다”라고 화답했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은 제주도에서 재회했다.

고인은 제주도 서귀포에 ‘서복 기념관’을 설립한 인물로도 주목을 받았다. 서복은 중국 진(秦)나라 시(始)황제의 신하로, ‘불로장생(不老長生)’ 약을 구하기 위해 3000명의 동남동녀를 이끌고 한반도를 찾은 인물로 전해진다.

서복은 서해안을 타고 내려오다가 제주도에 들렀고, 이곳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 때문에 제주의 서귀포가 서복이 돌아온 포구라는 이름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다. 고인이 중국인에게 불로장생, 진시황제 등을 연상하게 하는 인물의 기념관을 세운 셈으로, 그가 한·중 친선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고인은 <이세기의 중국 관계 20년>, <6·25전쟁과 중국> 등 중국 관련 저서를 펴내며 집필활동도 했다. <이세기의 중국 관계 20년>에서는 “한국과 중국은 친밀한 이웃이 되고 좋은 ‘꽌시(關係·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편 고인의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5호실에 마련됐고, 발인은 27일, 장지는 천안공원이다. 장례는 한·중친선협회장으로 치러진다. 유족으로는 아내 윤혜자 씨와 자녀 윤미, 윤주, 범준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