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끈, 치밀, 우유부단’… 현대家 후예들 5인5색 투자ㆍM&A

2020-08-27 06:03

현대차, 현대중공업, 현대백화점, 한라홀딩스, 현대종합금속, HDC, 현대종합상사, KCC 등등.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국내 내로라하는 그룹들이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중심으로 한 현대가(家)가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을 시작으로 반세기 넘는 역사 속에 이뤄놓은 결과물이다.

국내 최초로 해외 건설시장에 진출하고, 자동차 산업을 기반으로 한 세계화 전략을 내세우며, 갯벌 사진만으로 영국과 스위스 은행의 차관을 끌어다 조선소를 건설한 정주영 명예회장의 뚝심과 도전정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역사다.

한국 경제의 신화 그 자체였던 정주영 명예회장의 리더십을 이제는 몽(夢)자 돌림 2세, 선(宣)자 돌림 3세 혈족들이 이어받아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속도를 내고 있다. 특히 덩치가 커진 만큼 인수·합병(M&A) 등 대규모 투자를 통해 저마다 지속가능한 미래를 꿈꾸는 모양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업계의 평가는 엇갈린다. 각 그룹의 현대가 스타일에 따라 그 선택과 성과가 극명하게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각 그룹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만큼 이들의 행보에 대내외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7월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한국판 뉴딜 국민보고대회'에서 실시간 화상으로 연결된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의 그린 뉴딜 관련 발언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할아버지, 소탈함과 과감성, 선견지명 이어받은 정의선 수석부회장 ‘호평’
현대가 3세 경영인의 맏형이자 현대가의 핵심인 현대차그룹을 이끌고 있는 정의선 수석부회장의 투자 행보는 호평이 많다. 소탈하지만 과감한 성격에 선견지명까지 정주영 명예회장을 그대로 닮은 그의 리더십을 바탕으로 투자가 이뤄진 덕분이다.

미국 자율주행 전문기업 앱티브와의 합자사 ‘모셔널’ 설립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정의선 수석부회장은 지난해 9월 미국 자율주행 전문기업 앱티브와 미국 현지에 합작법인을 설립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합작법인 규모만 모두 40억 달러(약 4조8000억원)이며 현대차와 기아차, 현대모비스가 2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현대차그룹이 2조원이 넘는 투자금을 단일 회사에 한꺼번에 투입하는 것은 역사상 처음이다. 정의선 수석부회장의 과단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게다가 앱티브와의 합작법인 설립은 현대차그룹의 미래와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높은 평을 받고 있다. 정 수석부회장은 지난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전자제품박람회(CES)에서 ‘인간 중심의 역동적 미래도시 구현’이라는 미래 모빌리티 비전을 제시했다.

하늘을 나는 개인 비행체(UAM·도심항공 모빌리티)와 자율주행 전기차에 기반한 지상 운송수단(PBV·목적기반 모빌리티), 그리고 이들을 이어주는 허브공간(Hub·모빌리티 환승거점)이 정 수석부회장의 큰 그림이다. 이 핵심에는 자율주행 기술이 있다.

정 수석부회장은 최근 “반세기 이상 현대차그룹은 인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며 “모셔널은 안전하고 경제적이며 친환경 이동수단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할 차세대 대표 기업이 될 것”이라고 밝혔을 정도다.

정 수석부회장은 이 밖에도 ‘FCEV 비전 2030’ 등을 통해 현대차그룹의 투자 방향성과 미래를 명확하게 시장에 보여주고 있다. FCEV 비전 2030은 연간 50만대 규모의 수소전기차 양산체제를 갖추기 위해 2030년까지 모두 7조6000억원을 투자하고 5만1000명을 새로 고용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업계에서 현대차그룹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배경이다.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 [사진=현대백화점 제공]

◆정지선 회장 ‘공격적 승부사’·정기선 부사장 타고 난 ‘전략가’
정의선 수석부회장의 사촌이자 현대백화점그룹의 정점에 있는 정지선 회장은 ‘공격적 승부사’로 통하고 있다. 할아버지의 ‘불도저’식 경영 스타일을 가장 많이 닮은 손자로도 꼽힌다. 코로나19 등으로 대내외 경영환경이 불확실한 가운데에서도 M&A 등을 통해 사세를 빠르게 확장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정지선 회장은 지난 19일에도 현대백화점그룹의 계열사인 현대HCN을 통해 SKC가 보유한 SK바이오랜드 지분 27.9%(경영권 포함)를 1205억원에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국내 천연 화장품 원료시장 1위 기업 SK바이오랜드는 화장품 원료와 건강기능식품, 바이오메디컬 사업을 주력으로 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현대백화점그룹이 SK바이오랜드 인수를 통해 뷰티·헬스케어로 사업을 확대함과 동시에 기존 사업과 시너지를 극대화할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 현대백화점그룹은 지난 5월 한섬을 통해 기능성 화장품 전문기업 ‘클린젠코스메슈티칼’의 지분 51%를 인수하며 화장품 사업에 진출했다. 최근 원료 기업인 SK바이오랜드의 인수로 제조와 판매까지 이어지는 화장품 수직계열화가 완성된 셈이다.

그에게 단순히 ‘공격적’이라는 수식어만이 아닌 승부사라는 별칭까지 붙은 것은 M&A의 성공적인 결과에 있다. 2007년 취임 후 2008년 대형쇼핑몰 ‘디몰’ 인수를 시작으로 1~2년꼴로 기업을 인수했으며, 그중에서도 2012년 사들인 한섬과 리바트 M&A는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일컬어진다.

2012년 4200억원에 인수한 한섬의 경우 지난해 1조2000억원의 매출을 올릴 정도로 성장했다. 정지선 회장은 현재도 현대HCN 유료방송 사업 부문 등의 매각을 통한 자금 확보를 통해 또 다른 M&A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기선 현대중공업지주 부사장. [사진=연합뉴스]

현대가의 또 다른 3세 경영인 정기선 현대중공업지주 부사장도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주도하며 ‘전략가’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대우조선해양은 정체된 조선업계에서 현대중공업그룹이 새로운 도약에 나설 수 있는 디딤돌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정기선 부사장은 현대중공업그룹의 체질 개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최근 산업용 보일러 설계 및 제조 계열사 현대중공업파워시스템의 매각에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현대중공업파워시스템은 비주력 계열사에 속하는 데다 그룹과 시너지도 적어 매각을 통해 대우조선해양 등의 인수 재원으로 활용하려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 회사는 최대 3000억원 선에서 매각가격이 정해질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정 부사장은 이 같은 혁신 작업으로 경영능력을 평가받아 그룹의 수장으로 거듭난다는 전략이다. 아버지인 정몽준 현대중공업지주 최대주주가 그룹의 차기 수장으로 낙점한 정 부사장은 현재 승계에 있어 지분의 증여 작업이 남아 있는 상태다.
 

정몽규 HDC그룹 회장이 지난 5월 서울 종로구 아산정책연구원에서 열린 2020 K3·4리그 출범식에서 출범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몽규 회장 아시아나 뼈아픈 실책·정몽진 회장 승자의 저주(?)
현대가 3세 경영인과 달리 2세 경영인들의 최근 M&A를 비롯한 투자는 상대적으로 혹평받고 있다. 오판과 함께 우유부단한 자세로 회사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가의 2세 경영인 정몽규 HDC그룹 회장이 그 중심에 있다. 지난해 말 항공업계 최대 매물이었던 아시아나항공의 인수를 결정했지만, 반년이 넘도록 최종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코로나19 등 예기치 못한 변수가 있었으나, 경영인으로서 무책임하다는 비판은 피하지 못하고 있다.

26일에도 아시아나항공 인수 문제를 놓고 정몽규 회장은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과 서울 모처에서 만났지만 매듭을 짓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서도 두 회장은 아시아나항공 인수 문제 논의를 위해 두 차례 만난 바 있지만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한 바 있다.

아시아나항공 인수 주체인 HDC현대산업개발(HDC현산)은 코로나19 사태로 작년 말과는 인수 환경이 달라졌다며 12주간의 재실사를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인수 실패 책임을 떠넘기려는 전략으로 보고 있다. 차라리 빠른 선택을 해 양사에 피해를 줄이면 비판을 피할 수 있지만, 애매모호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동걸 회장이 최근 “여러 번의 공문 및 보도 자료에서 나온 HDC현산 주장은 근거가 없고 악의적으로 왜곡됐다고 본다”며 “금호산업은 신의성실에 입각해서 최선의 노력을 했으며 계약 무산위험은 HDC현산이 원인을 제공했다”고 비판한 이유이기도 하다.

일각에서는 정몽규 회장이 현대가답지 않게 정면돌파하지 않는 것도 아쉬운 점으로 지적한다. 당장은 어렵더라도 국내 2위의 항공사를 인수했을 때 HDC현산은 물론 범현대가에 큰 시너지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일례로 정몽규 회장이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통해 꿈꿨던 종합 모빌리티 그룹으로의 성장은 현대차그룹의 비전과도 맞닿아 있다.
 

정몽진 KCC그룹 회장. [사진=KCC 제공]

현대가의 또 다른 2세 경영인 정몽진 KCC 회장도 M&A에 있어 공격적이란 수식어는 가졌지만 승부사의 수식은 아직 붙지 않고 있다. 지난해 인수한 미국 실리콘업체 ‘모멘티브’가 KCC를 승자에 저주에 빠뜨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정몽진 회장은 KCC 미래 성장동력으로 실리콘을 점찍고 있다. 미국 다우듀폰, 독일 바커와 함께 세계 3대 실리콘기업으로 유명한 모멘티브가 시장에 매물로 선제적으로 인수한 배경이다.

인수금액은 무려 3조5000억원가량으로 삼성전자의 하만 인수, 두산인프라코어의 밥캣 인수에 이어 역대 한국기업의 M&A 가운데 셋째로 큰 규모에 해당한다. 주력 사업인 건자재와 도료산업의 성장성이 불투명한 상황이라 일종에 도박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는 무모했다는 평이 우세하다. 시장 반응이 그 방증이다. KCC 주가는 모멘티브 인수가 알려진 2018년 9월부터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당시 34만원을 넘나들던 주가는 현재 14만대로 반 토막이 났다. 무디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한국신용평가 등 국내외 신용평가사들은 앞다퉈 신용등급 하향 조정을 검토하거나 하향 조정했다.

다만 업계에서는 정몽진 회장이 보수적인 스타일의 경영인인 만큼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그는 평소 “모르는 분야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으며 새로운 사업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평균 5~7년의 검토 끝에 조심스럽게 들어간다”고 대내외에 자주 밝힌 바 있다.

재계 관계자는 “현대가는 이제 1세를 넘어 2세 경영도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며 “3세 경영인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이유로, 현대가의 미래를 보려면 이들의 행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1987년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사진 가운데)이 현대중공업 선박 건조 현장을 찾아 근로자들과 대화하고 있다. [사진=현대자동차그룹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