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43)] 새벽3시 냉수마찰과 '류영모체조법'
2020-05-13 14:06
아랫배에 숯을 굽듯 단전을 구워라
1919년경 스페인독감 때도 멀쩡했던 비결?
1919년은 3·1만세운동으로 기억되는 해이지만, 들끓는 전염병의 해이기도 했다. 그 전해인 1918년에 스페인 독감이 들어왔고, 1919년 8월에는 콜레라까지 번졌다. 두 전염병은 1920년까지 기승을 부렸는데, 스페인 독감 사망자는 18만명이나 됐고 콜레라 사망자는 2만4300명에 이르렀다. 류영모의 식구들도 모두 '독감'을 앓았다. 태어난 지 50일밖에 되지 않은 둘째 아들 류자상이 기침을 몹시 했고, 사촌집에서는 사망자도 있었다. 어린 시절 유난히 몸이 약했던 류영모는 당시 29세였는데, 가족 중에서 혼자만 멀쩡했다. 그래서 도맡아 감기약을 지으러 다녔다고 한다. 단지 운이 좋았던 것일까.
그는 자신이 건강을 유지했던 비밀로 냉수마찰을 꼽는다. 당시 그는 10년째 이 건강법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 이후로도 쉼없이 계속하여 평생 동안 냉수마찰을 하며 살았다. 새벽 3시는 언제나 그가 냉수를 축인 수건으로 온몸을 닦는 시간이었다. 집을 나가서 새벽을 맞는 때에는 맨손으로 온몸을 문질러 냉수마찰 효과를 냈다. 이후엔 체조를 하고 단전호흡을 했다. 하루 두 시간가량을 이 건강 수련에 썼다. 단전호흡 후에는 석가처럼 명상을 했고 그때 떠오르는 생각을 기록해 놓았다. 이 기록을 '다석일지'라고 부르는데, 거기엔 성령으로 뚫린 생각들이 빼곡히 기록되어 있다.
"몸에는 힘이 있어야 하고 마음에는 얼이 있어야 합니다. 몸에 힘이 있으려면 혈관이 잘 뚫려 신선한 피가 돌아야 하고 마음에 얼이 있으려면 마음의 막힌 곳을 뚫어 신의 성령이 잘 돌게 하여야 합니다." 그는 건강을 '몸성히'라는 말로 표현했다. 몸이 성한 것이야말로 영성을 돋우는 힘이 된다. 천리를 가려는 사람이 자동차를 닦고 정비하듯, 천리(天理, 하늘의 진리)를 향해 가는 사람이 그 얼을 열심히 챙겨야 한다는 것이다. 건강은 제 몸뚱이 하나 잘 살고자 하는 일이 아니라 '얼나'로 나아가기 위한 책임감으로 챙기는 것이라고 류영모는 강조한다.
매일 드나드는 목욕탕에다 <대학>에 나오는 '구일신 일일신 우일신(苟日新 日日新 又日新)'을 붙여놓았다는 어느 황제(탕왕)의 고사를 그는 인용하곤 했다. "진실로 하루를 새롭게 하려면 하루하루 새로워지고 또 날마다 새로워져라"는 저 말은, 제 몸을 씻고 깨끗이 닦아내는 일이 단순한 육신 청결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일깨워준다. 류영모는 기독교의 '세례' 또한 그 근본은 '육신을 깨끗이 씻는 행위'에 성령이 임하는 것을 비유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일찍이 습관을 들인 냉수마찰을 영성 수련의 일부로 승화시킨 셈이다. 그는 평생 속옷을 입은 적이 없으며, 팔에 끼는 토시나 목에 두르는 목도리 같은 것도 걸친 적이 없었다.
백석 시인의 혈족 백이행과 오산학교
평북 정주의 시인 백석(1912~1996)은 오산학교 출신이다. 하지만 류영모와 직접 만날 기회는 없었던 것 같다. 류영모는 1921년 오산학교 교장으로 부임했고, 1년 정도 근무하다가 일제 당국의 교장 인준 거부로 직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22년 11월부터 1923년 7월까지 설립자 이승훈의 간청으로 한 학기 동안 평교사 자격으로 다시 강의를 했다. 백석은 7살에 오산소학교에 입학해 다녔고, 13살이던 1924년에 오산고보에 입학해서 5년간 공부를 했다.
두 사람은 함께 오산학교에 있었지만 백석은 소학교 학생이었고, 류영모는 오산고보 교장이었다. 백석이 기독교의 분위기를 익힌 것은 오산학교에서였다. 류영모가 이 학교에 처음 전파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백석은 1930년 일본 감리교 재단 학교인 청산학원에 입학했고 학교에 소속된 교회에서 세례를 받기도 한다. 그의 정신 속에도 류영모의 자취가 스며들어 있었다는 얘기다. 물론 그의 시에 기독교적 분위기는 거의 나타나지 않지만, 그가 전공한 영문학과 더불어 서구 세계에 대한 안목을 키우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오산학교 교장은 초대 백이행(白彛行·1845~1935) 교장으로부터 여준-조만식-류영모로 이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주의 선비로 이름 있었던 백이행은 본명이 백기행이었던 백석과도 먼 혈족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백이행의 딸(백숙량)은 고려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낸 현상윤(1893~ 미상)에게 시집을 갔다. 정주 사람인 현상윤은 3·1운동 당시 체포된 48인 중의 한명이었다. 초기에 독립운동가로 활약하였으나 중일전쟁 이후 친일로 돌아섰다. 한국전쟁 중 납북되어 이후 행적을 알지 못한다. 그는 '조선유학사'라는 책을 냈고 이 방면의 선구자로 꼽힌다.
또 백이행의 친척(종조카) 중에 백인제(1898~납북 미상, 백인제의 부친은 백희행)도 있다. 정주 출신으로 오산학교를 나온 그는 일제강점기의 최고 외과의사로 마취기술을 처음으로 습득했으며, 도쿄대학에서 구루병 연구로 의학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다. 1928년 오산학교 때의 스승이었던 이광수의 건강이 악화되었을 때 백인제는 이광수의 왼쪽 신장 결핵을 진단하고, 국내 처음으로 적출(摘出) 수술에 성공했다. 제자 백인제가 스승 이광수의 생명의 은인이 된 것이다. 1941년 경의전에 '백인제 외과의원'을 열었고 이 병원은 날마다 문전성시였다. 해방 이후엔 서울대 의대 창설을 주도했으나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됐다. 서울 북촌(종로구 가회동)에는 백인제 가옥이 서울시 민속문화재 22호로 보존되어 있다.
65세 백이행 - 20세 류영모, 1박2일 유학 토론
류영모는 1910년 10월 1일 오산학교 과학교사로 갔을 때 백이행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류영모는 그를 오산학교 초대교장으로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학생 7명으로 개교한 학교였는지라, 딱히 교장이란 직책을 부여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설립자 이승훈으로서는 정주의 유지였던 백이행을 학교에 직접 가담케 하여 지역 양반 자제들을 오산학교로 입학하게 할 전략이 필요했을 것이다. 백이행은 또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였기에 이후에 오산학교의 종교적 입지를 넓히는 데도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실제 백이행은 종제인 백희행과는 종교가 달라 서로 소원했던 사이였지만, 백인제 등 아이들을 오산학교에 보내도록 독려하기도 했다. 이런 백이행의 역할이 척박한 환경에서 오산학교를 제대로 출범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지역에서 명성이 높았던 백이행을 교사 류영모가 직접 찾아갔다. 이틀간을 함께하며 유학을 담론했다고 한다.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0세의 청년이 당시로선 명망가 노인인 65세의 백이행과 마주 앉아 공맹을 논한 사건은 학자 류영모의 패기를 말해준다. 23세의 율곡이 58세의 퇴계를 찾아가 학문을 논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류영모는 뜻밖에도 평생의 보물이 될 '건강체조' 하나를 배운다.
"제가 몇년 전, 그러니까 환갑이 지나서 폐결핵에 걸려 다 죽게 되었지요. 식구가 정주 덕다리에 있는 조한의원에 약을 지으러 갔는데 의원이 체조를 가르쳐 주고 그대로 하라고 일렀습니다. 날마다 빠짐 없이 운동하면 꼭 효험을 볼 것이라고 말했지요. 긴가민가했는데, 그걸 실천해보니 정말 건강이 회복되더군요. 그런데 얼마 뒤 다시 재발해서 한의원에 다시 갔습니다. 조의원은 그 운동을 계속하느냐고 묻더군요. 병이 나아서 그만뒀다 했더니 혀를 차면서 그래서 재발한 것이라고 말을 합디다. 다 나아도 계속 그 운동을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하게 됐고, 건강을 찾았습니다."
백이행에게서 배운 맨손체조의 힘
백이행의 이 말을 듣고 류영모는 그때 이후 평생 이 실내 맨손체조를 실천했다. 백이행은 90세까지 살았고, 류영모는 91세까지 살았다. 이 체조를 해방 이후 꾸준히 실천하며 제자와 지인들에게 보급한 이가 류영모이니, 이 체조 이름을 '류영모 체조'라고 할 만하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더욱 이 체조가 필요하다는 게 그의 역설이다. "손주들에게 등을 두드려달라 하지만 제 손으로 몸을 움직이고 만지고 두드려 몸에 피를 돌리는 게 좋습니다. 늙어서도 무엇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맘대로 일어나고 앉을 수 있어야 합니다."
새벽 3시면 일어나 항상 했던 '류영모 맨손체조법'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두 다리를 나란히 앞으로 뻗는다.
①두 팔을 어깨 폭과 높이로 들어올린다.
②두 팔을 어깨 높이로 가슴껏 뒤로 벌린다
③두 팔을 안으로 오므려 굽히면서 두 손등끼리 몸통 앞뒤로 부딪힌다.
④두 팔을 앞으로 뻗치면서 두 팔을 붙인 채 손바닥으로 위로 향하게 하여 밖으로 비튼다.
⑤그대로 머리 위로 손을 넘겨 두 손바닥으로 뒤 잔등을 소리나게 친다.
⑥두 팔을 앞으로 돌려 어깨 높이로 나란히 든다.
⑦허리를 굽히며 두 손을 뻗친 발바닥을 잡을 수 있도록 힘껏 엎드려 뻗친다.
⑧같은 자세로 한 번 더 허리를 굽혀 두 손으로 각각 발바닥을 잡고 힘을 준다.
⑨허리를 바로 하며 두 손으로 앞으로 나란히 뻗는다.
⑩두 팔을 두 다리 위에 내려놓는다.
이상의 몸놀림을 30분 이상씩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해야 한다.
이 체조는 1954년 창간한 한국일보사에서 발행하는 잡지(코리아라이프)에 사진과 함께 소개되었다. 1959년 12월 8일 KBS 라디오 방송으로도 소개되었다. 요가도장의 초빙으로, 류영모는 을지로에 있는 체육관에 가서 특강을 한 일이 있다. 1951년 피란 시 부산에서 살 때 부인 김효정은 견비통으로 오른팔로 머리에 빗질도 못하였다. 류영모는 아내에게 체조를 가르쳤고 깨끗이 나았다.
체조는 정조(貞操), 지조(志操)와 함께 인간이 늘 바로 잡아야 할 '세 가지 지킴(3操)'중의 하나라고 류영모는 말했다. 정조는 '곧이(貞)'를 단단히 잡는 것이고 지조는 뜻을 바로 갖는 것이며 체조는 몸을 반듯하게 가지는 것이다. 이 셋 중에서 하나라도 갖추지 못하거나 치우치면 균형을 이뤘다고 할 수 없다. 체조를 하려면 지조를 지녀야 하고 지조를 지니려면 정조를 지녀야 한다. 몸짓을 잘 가져야 마음 놓임을 얻고 마음 놓임을 얻어야 뜻을 얻을 수 있다. 그래야 할 바를 단단히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진선미(眞善美)는 인간이 바로 세워 지키는 것의 뛰어남을 의미한다.
다석어록 = 아랫배에 숯을 굽는 법, '좌망'의 비밀
아랫배에 단단하게 단(丹)이 박힌 사람이 도인이다. 그들의 기운은 상쾌하며 정신은 고상하다. 그들이 시행한 것은 정좌(正坐)다. 깊이 숨을 들이쉬면서 배 밑에 마음을 통일하는 것이다. 나중에는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지경에 이른다. 이것을 장자는 좌망(坐忘)이라고 했는데 불교의 참선과 같다. 아랫배에 힘이 붙기 시작하면 기해단전(氣海丹田, 기의 바다와 단의 밭, 즉 아랫배 부위)에서 '단(丹)'이 만들어진다. 마치 나무를 불완전연소시켜서 숯을 굽는 것과 같다. 밥의 알짬(精)으로 단(丹)을 만드는 것이다. 아랫배 안에서 숯과 같은 '단'이 굳어지면서 거기서 나오는 열이 기운이다. 이 숯이 금강석이 되면 지혜가 신(神)이다. 정(精)을 함부로 내버리지 말고 아끼고 아껴서 그것으로 숯을 구워 석탄을 만들고 금강석을 만드는 것이 좌망이다. 이리하여 사람은 없어지고 신선이 된다. 사람에게 힘이 있다면 정(精)이라는 기름을 불 태워서 기관을 움직이는 것일 것이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