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41)] 나는 밤마다 죽는다, 류영모의 칠성판 '메멘토 모리'
2020-05-06 10:42
40년간 널판 위에서 잠들고 생활하다
우린 태어날 때부터 사형선고 받은 몸
식색(食色, 식사와 정사)을 끊기로 한 일은, '몸'을 바꿔보기로 한 것이다. 삶의 주인 노릇을 하려는 몸을 삶의 수족(手足)으로 길들이려는 것이었다. 삶의 주인은 따로 있으니, 식욕과 색욕으로 나를 더 이상 움직이지 말라. 식(食)을 죽이고 색(色)을 죽이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식색을 죽이는 것은 몸을 죽이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이라면 실없는 호언일 수 있지만, 이후 평생이었던 40년이라면 극기(克己)에 이른 것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시작일 뿐, 몸을 넘는 일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몸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뭘까. 제 육신이 활동을 멈추는 죽음이다. 식색을 금하는 일은 몸의 요구를 낮추는 일이지만, 몸이 느끼는 숱한 공포와 불안은 어떻게 할 것인가. 죽음이 무엇인지 시시각각으로 깨닫는 일이야 말로 몸나의 한계를 벗는 기폭제가 아닐 수 없다. 육신을 지닌 자, 살아있는 자가 어떻게 죽음과 적극적으로 대면(對面)할 수 있을까.
금식·금색의 51세를 보낸 그는 그 이듬해인 1942년에 몸이 기거(起居)하는 방식을 바꿔버린다. 이것은 식색의 단절보다 훨씬 더 직접적이며 시시각각의 삶의 조건이었다. 이런 전환이 있기 전에, 중생(重生)을 체험하는 획기적 순간이 있었다(중생에 대해서는 다시,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기존의 삶의 모든 양식들을 일거에 깨고 순식간에 가 닿는 '깨달음'을 얻은 뒤, 류영모는 죽음을 깔고 죽음에 눕는 고행(苦行)을 일상화한다.
관 바닥에 까는 널판을 구입
52세의 류영모는 안방 윗목에다 잣나무 널판을 들여놓았다. 상가(喪家)에서 쓰던 널판이었다. 당시 시장에 가면 조선시대 왕족이 쓰던 홍제동 구사니숲의 100년 된 소나무와 잣나무 널판 재목이 팔리고 있었다. 친척의 이종조카에게 부탁해서 그중 하나를 샀다. 잣나무 판의 두께는 세 치였고 폭은 석 자, 길이는 일곱 자였다. 그것을 닦아 널판으로 만들었다. 널판으로 만들었으나, 관 속에 넣으려고 만든 건 아니다. 상징적인 죽음의 공간을 사는 자리에 만들어 놓은 것이다.
관 속 바닥에 까는 널판을 칠성판(七星板)이라 한다. 북두칠성을 본떠 7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 판으로, 염습(殮襲, 주검을 목욕시키고 옷을 입힘)한 시신을 눕히는 자리다. 북두칠성을 만들어놓은 데에는 죽은 자의 명복을 비는 기원(칠성신은 전통 신앙과 도교의 신앙이 서로 섞인 것이다)이 담겨 있다. 칠성판은 시신을 고정시키는 판으로 시정판(屍定板)이란 명칭을 쓰기도 한다. '칠성판을 등에 졌다'는 말은 죽어서 관에 들어갔다는 의미다. 남들은 죽어서 칠성판을 등에 졌지만, 류영모는 살아서 그것을 밤마다 지고 잠을 잤다. 낮에는 칠성판을 방석삼아 꿇어앉아 있고 밤에는 거기에 잠을 자니, 낮에는 살아났다가 밤에는 죽는 형상이 아닐 수 없다. 이 전무후무한 기행(奇行)을 죽을 때까지 일삼았으니, 사람이 이렇게 산 경우는 인류 역사에 없었다. 대체 그는 왜, 이런 섬뜩하고 불편한 기거를 자초했을까.
晨兀夕展屈伸狀(신올석전굴신상)
三十星霜柳老潤(삼십성상류로윤)
自初至終運年輪 (자초지종운년륜)
百世生成柏子板(백세생성백자판)
새벽에 벌떡 저녁엔 쭈욱, 굽히고 펴는 일
삼십년 별과 서리 맞아 류씨 늙은이 빛깔 좋네
몇 살까지 살지의 자초지종은
백년을 산 잣나무 백자 널판에 새겨지리
류영모의 시 '백판거사(柏板居士, 잣나무 널판에 사는 사람)'
널판 위에서 해방-전쟁-쿠데타를 맞았다
류영모는 어린 시절 몸이 연약하고 왜소해서 의사로부터 "오래 살지 못할 것"이란 얘길 들었다. 의사의 이 예언을 평생 잊을 수가 없었다. 언제고 죽음을 맞을 수 있을 것 같은 하루하루를 사는 기분을 느꼈다. 이 시는 칠십 수를 넘긴 뒤에 썼을 것이다. 1942년에 시작한 백판(柏板)생활을 한 지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생기가 흐른다는 자기 진단을 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을 '백판거사'라고 자호(自號)했다. 그 긴 시간 동안 신올석전(晨兀夕展, 아침에 벌떡 일어나고 저녁에 쭉 뻗어 자는 일)을 거듭했으니 백판과 자신이 드디어 일심동체처럼 여겨질 만하다. 백판에서 식민지 최악의 시기를 건너 해방을 맞았고, 한국전쟁의 난리를 겪었으며, 4·19혁명과 5·16쿠데타를 겪었다. 군사정권의 곡절과 류달영(1911~2004, 류영모를 평생 추앙했던 사람이다)이 기획한 새마을운동과 근대화를 지켜보았다. 서른 해의 성상이 백판 위에 아로새겨진 셈이다.
시에서 말한 운년륜(運年輪, 나이테의 운명)은 어릴 적 의사가 말한 불길한 예언을 떠올리며 한 말이었을 것이다. 의사는 일찍 죽는다 하였는데, 벌써 칠십을 넘겼으니 허튼소리였음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런 뜻만은 아니다. 이 딱딱한 나무 바닥에 기거했기에 그런 뜻밖의 수(壽)를 누릴 수 있었을지 모른다.
류영모는 백판생활을 이야기할 때 '등뼈론'을 말했다. 등뼈는 설 때는 기둥역할을 하고 엎드리면 용마루 역할을 한다. 사람이나 짐승이 필요로 하는 유기물질을 보관하는 창고이기도 하다. 등뼈 속에는 온몸의 여러 기관과 뇌를 이어주는 신경조직이 들어 있다. 등뼈만 잘 간수해도 건강을 지킬 수 있다고 한다.
사람의 몸은 악기요, 등뼈는 조율기관
짐승은 기어다니므로 등뼈에 부담을 덜 주지만 사람은 기립 생활을 하기 때문에 등뼈에 부담을 많이 줄 수밖에 없다. 척추디스크에 쉽게 걸리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경추, 흉추, 요추 가운데 요추(허리등뼈)에 이상이 잘 일어난다. 이 등뼈를 꼿꼿이 바르게 가진다는 게 그래서 중요하다. 낮에 활동을 하다 보면 등뼈가 굽어지기 쉽다. 그래서 밤에 잘 때는 딱딱한 나무판 위에 누워서 비뚤어진 등뼈를 펴주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류영모는 사람의 몸은 악기(樂器)와 같다고 했다. 음악을 옛사람들은 율려(律呂)라고 했는데, 그때의 여(呂)자가 등뼈를 표현한 글자라고 말한다. 악기가 제대로 소리를 내려면 조율이 되어 있어야 하듯이, 사람의 몸 또한 등뼈를 중심으로 잘 조율이 되어 있어야 신이 인간이란 악기를 탈 때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러고 보니 '몸'이란 글자도 등뼈악기 '여(呂)'와 닮아 있으니 묘하다.
널판에서 잠을 잔 까닭은 허리를 보호하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골골했던 까닭은 허리가 약한 데 있었고, 그는 의식적으로 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바른 자세를 잡으려 애를 썼다. 백판생활을 하기 한 해 전(1941년 8월), 류영모는 아카시아나무 울타리 가지를 치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져 허리를 크게 다쳤다. 허리에 대한 경각심을 크게 가지게 된 계기였을 것이다. 딱딱한 나무 바닥에서 자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저 날 당한 사고도 한몫했을지 모른다. 그는 처음엔 반원(半圓)으로 된 나무 목베개를 베었으나 나중엔 그것마저 없이 잤다. 나이가 많아지면서 겨울에만 담요 한 장을 깔았을 뿐이다.
방문객, 칠성판 위의 산 사람 보고 기겁
류영모의 북한산 뇌곡산장(牢谷山莊)을 방문한 이들은 칠성판 위에 꼿꼿이 앉아 있는 사람을 보고 속으로 기겁을 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 널판 위에 앉은 꼴이었다. 하기야 간밤에 관 속에 누웠다 다시 일어난 사람이니 그런 느낌을 주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 엽기적인 널판생활은 건강만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죽음'에 대한 시시각각의 예행연습 같은 것이었다. 이 점이 류영모의 '영성생활'의 핵심이다. 매일 죽고 매일 부활한다.
류영모가 관 속의 널판 위에서 잠을 잔 것은 한국 버전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라고 볼 수 있다. 옛 로마에서는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메멘토 모리"라고 외치게 했다. 지금은 개선장군이지만, 언젠가는 죽은 장군이 될 것이라는 것을 환기시키는 이벤트였다.
죽음은 매 순간마다 인간을 노리고 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굳이 인간의 유한성을 부인하거나 외면하려 하지 말고 죽음을 의식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다. 류영모의 관 속 생활도 그랬다. 삶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죽음의 자리를 늘 분명하게 의식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주어진 생에서 진정한 가치를 찾고자 하는 깨어 있는 의식이기도 하다.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의 어느 신부는 날마다 무덤을 한 삽씩 팠다고 한다. 자신이 묻힐 곳이었다. 무덤을 파면서 삶이 어떤 의미인지를 성찰했으며, 죽음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깨달아 나갔던 셈이다. 류영모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무덤생활'을 40년간 한 것이다.
얼생명엔 죽음이 없다, 두려움 없이 살라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인간 3대 독성을 뽑아내려면 죽음을 의식해야 했다. 3독은 바로 '제나'의 얼굴이며, 제나에게 죽음을 기억하라고 끝없이 경고하는 까닭은, 제나의 죽음은 곧 얼나에 닿는 길이기 때문이었다. 3독의 노예로 살던 사람이 갑자기 선한 언행을 하면 '저 사람이 죽으려고 마음이 변했나' 하는 말을 하기도 한다. 죽으려고 마음이 변했다는 그 마음이 바로, 본심이며 얼나에 닿는 마음이다.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변하지 말고, 미리 변하여 나아가라는 뜻도 숨어 있다.
류영모는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영생이란 죽음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얼생명에는 죽음이란 없습니다. 이 껍데기 몸이 죽는 거지 참나인 얼은 죽는 게 아닙니다. 죽음을 무서워하고 싫어할 까닭이 없습니다. 죽음이란 이 몸이 퍽 쓰러져서 못 일어나는 것밖에 더 있습니까? 이 껍데기가 그렇게 되면 어떻습니까? 진리인 얼생명은 영원합니다."
'백판거사' 시를 썼던 그 무렵, 그러니까 1970년대쯤에 류영모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이 세상을 떠나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내 나이 일흔 살에 가깝습니다. 일흔이라는 뜻은 인생을 잊는다는 뜻이 아닐지요. 이 세상에 좀 더 살았으면 하는 생각은 없습니다." 다석은 두려움 없이 살라고 말했다. 하느님의 아들인 우리가 무엇이 두렵겠는가. 몸나가 있어서 걱정인데 몸나로 죽고 얼나로 솟난 신의 아들이 무엇이 두려운가. 시편에는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나의 아들이다'라는 말이 있다. 두려움 없이 살라.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