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39)]'100년 비만문명을 꾸짖는 영성의 만찬' 류영모 하루한끼
2020-04-22 09:51
세끼는 짐승의 식사, 한끼는 신선의 식사
그가 실천한 한끼는 '영성의 만찬'
류영모가 하루 한끼의 삶을 선언하고 실천한 것은 육체의 건강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건강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영성을 가꾸기 위해 건강한 몸은 꼭 필요하기에, 건강은 신에 대한 의무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에게 육체는 벗어버릴 허물이나 옷일 뿐이었다. 육체 위에 다시 옷을 입는 것은 육체가 옷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옷은 아무리 겹겹이 입었더라도 다 벗어야 할 것들이다.
그가 실천한 '한끼'는 오직 인간이 지닌 짐승의 욕망을 극복하고 절제함으로써 영성에 집중하는 힘을 얻고자 하는 방편이었다. 한끼는 그의 얼나 사상을 실천하는 수행이며 궁신지화(窮神知化)였다. 영성에 대해 절박한 궁리를 하여 마침내 만물의 조화를 터득하는 길에, 스스로의 '도시락'을 그런 방식으로 싼 것이다. 이것이 '한끼 건강식'을 실천하려는 부류와는 애당초 다른 차별점이다. 류영모는 학교에 다니던 시절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하루 두끼를 수십년간 실천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하루 한끼는 그 단계를 높인 것에 불과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먹는 것에 대한 욕망과 교접하고자 하는 욕망은 짐승에게도 고스란히 있다. 그것을 제외해야 짐승과 다른 '인간'의 면모를 찾을 수 있다. 류영모는 이 문제에 대해 깊은 성찰을 계속했고, '금식금색(禁食禁色)'이 짐승을 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는다. 세상의 모든 동력을 이루는 욕망에서 벗어나야 하느님을 내 안에 들일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먹는 욕망은 부(富)에 대한 환상을 불렀고, 색욕은 귀(貴)에 대한 망념을 키웠다. 부귀란 식욕과 색욕의 변형이며, 부귀영화는 식욕과 색욕을 마음껏 누리고픈 마음의 너울일 뿐이라는 통찰이다. 세상에는 그것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한가를 묻는 현세주의자들이 넘친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삶과 죽음을 관통하여 짐승을 벗어나는 초월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류영모의 한끼는 '영성의 만찬'이었다. 한끼는 단순한 식생활의 변화가 아니라, 짐승의 길과 영성의 길이 갈라지는 지점이었고, 몸나의 길과 얼나의 길의 분기점이었다. 짐승에서 하느님으로 '솟나'는 혁명의 밥그릇이었다.
예수는 익은 몸을 바친 '밥'이었다
금식금색을 선언했을 때 그는 단색(斷色)은 가능했으나 단식(斷食)은 지속가능하지 않음을 알았기에 부득이 하루 한끼를 먹기로 했다. 일일불이식기(一日不二食飢)란 말이 있다. 하루 두끼를 못 먹으면 굶주리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니, 한끼는 '단식'에 준하는 최소한의 생존식사라고 할 수 있다.
류영모는 '밥의 사상'을 말했다. 누구나 목숨을 가지고 있으면 당연히 먹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생각을 돌이켜 봐야 한다. 밥은 익은 것이다. 완전한 사람, 무르익은 사람이 아니고는 밥을 먹을 자격이 없다. 밥은 정말로 익은 사람에게 제 익은 몸을 공양하는 것이다. 스스로 제물이 되는 것이다. 그 밥을 함부로 떠먹겠는가. 밥 앞에서 그 생각을 하여야 한다.
예수는 십자가에 자신을 바쳤다. 바쳤다는 것은 밥이 되었다는 말이다. 밥이 되었다는 것은 밥을 지을 쌀이 되었다는 말이다. 쌀이 되기 위해선 열매가 무르익어야 했다. 사람이 밥을 먹는 것은, 인생이 밥을 먹을 자격이 있어서 먹는 것이 아니고 내 힘으로 먹는 것도 아니다. 신의 은혜로, 수많은 사람들의 덕으로, 대자연의 공으로 주어져서 먹게 된 것이다.
밥을 먹지 않을 수 없지만, 밥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한끼사상의 핵심이다. 먹어야 산다는 것은 몸일 뿐이며, 안 먹어야 사는 것은 정신이다. 그는 가끔 금식을 하면서 육신과 정신의 대화를 느끼곤 했다. 죽음 앞에서도 그는 금식을 했다. 부모가 돌아갔을 때도 그랬고, 상가에 갔을 때도 그랬고, 제삿날에도 그랬다. 먹거리를 돌려 대접을 하는 것은 죽은 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하지만 다석은 자신의 다른 수행방식이나 깨달음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하루 한끼를 다른 이에게 강제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오로지 '자율일식(自律一食)'이었다. 류영모는 자신의 일일일식을 건강식으로 제안할 뜻도 없었고 남들에게 굳이 따르라고 권하지 않았다. 타율적인 금식은 오히려 반대를 했다.
신의 제물을 감히 도적질하는가
하루 세끼는 짐승의 식사, 두끼는 사람의 식사, 한끼는 신선의 식사다. 류영모가 하루 한끼를 실천하면서 했던 말이다. 사람답다는 말이 있다. 짐승과 같음을 면했다는 뜻이다. 짐승은 오직 두 가지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 산다. 배 고프면 먹는 것, 그리고 짝을 만나 교접을 하는 것. 식색(食色)은 생명체가 저마다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식색으로만 사는 것을 면하는 일이 '사람다움'이며, 그것은 식색으로만 삶의 의미와 가치를 채우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식색은 육신의 바탕을 잃지 않을 만큼의 최소한을 지키되, 있는 힘을 다해 참된 나를 찾고 만나는 일을 하는 것이 사람다움이라고 말한 사람이 류영모다. 그는 하루를 일생처럼 일생을 하루처럼 살았다. 오늘을 잃으면 일생을 잃는다. 오늘을 잡으면 일생을 얻는다. 류영모가 역설하던 말이다. 하루 한끼를 먹고, 하루살이로 살고, 일일일인(一日一仁)을 실천한다. 이것이 그의 간절한 신앙생활인 '하루정신'이었다.
류영모의 한끼의 강의를 들어보자.
밥 먹고 자지 말고 밥 먹고 깨어나야 한다. 밥은 제물(祭物)이다. 우리 몸은 신이 머무는 성전이다. 성전에 드리는 제사가 바로 밥이다. 내가 먹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드리는 것이다. 밥 먹는 일은 예배요 미사다. 내가 먹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의 제물을 도적질하는 것이다. 신을 사랑하는 것은 예배 드리는 마음으로 밥을 먹는 것이다.
알찬 쌀을 쭉정이 같은 내가 먹을 자격이 있단 말인가. 부족한 우리는 떳떳이 먹을 수 없다. 참으로 미안하기 그지없으나 안 먹을 수 없으니 먹는 것이다. 먹는 까닭은 구차한 생명을 연장하자고 먹는 것이 아니다. 이제라도 깨서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깨우치는 약으로 먹는다. 신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먹어야 쌀에 대해 덜 미안하지 않겠는가. 신의 뜻에 욕심을 붙일 수가 있는가. 식탐으로 먹을 일이 아니라 신의 뜻을 깨우치는 각성제로 먹는 약이다. 실컷 먹겠다는 생각을 버린 사람은 일부러 금식을 한다. 먹을 것이 모자라서 먹기를 끊을 때는 신의 은혜로 알고 감사히 받는 게 맞는다. 안 먹으면 물론 죽는다. 안 먹고는 못 사니까 먹는다는 말은 맞는다. 그러나 너무 많이 먹는다. 적게 먹고 편히 살 수 있는데도 많이 먹고 배탈이 나서 고생을 한다. 사람이 안 먹으면 병이 없다. 말씀을 바로 아는 집에서는 '나쁘듯 먹여라'는 말을 한다. 온당한 말이다.
줄곧 곧이(貞)의 정신을 가지고 입 다물고 숨을 쉬어라. 그러면 숨이 잘 쉬어진다. 먹는 것이 지나치면 식곤이 생겨서 잠이 많아지고 앉아도 바로 앉지 못한다. 숨도 제대로 못 쉰다. 숨쉴 식(息) 자는 '코(鼻)'에 '염통(心)'이 붙어 있는 글자다. 사람이 곧이 가려면 숨쉬는 일이 왕성해야 한다. 세상 모르고 잠이 들 때도 숨은 더 힘차게 쉰다. 불식(不息)은 묘한 말이다. 숨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쉬지 않으니 불식이다. 그런데 쉬지 않는 것이 숨이요 쉬는 것이 바로 숨이 아닌가. 건강은 식불식(息不息, 숨쉬기가 쉬지 않는 것)에 있다.
우리의 숨은 목숨인데 이렇게 할닥할닥 숨을 쉬어야 사는 생명이 참생명일 수 있겠는가. 성령을 숨쉬는 얼생명이 참생명이다. 참생명에선 숨쉬지 않아도 끊기지 않는 '얼숨'이 있을 것이다.
과식하면 왜 숨쉬기가 불편하겠는가
확실히 과식하면 숨쉬기가 불편하다. 그것은 신의 뜻에 합당하게 먹지 않았다는 의미가 된다. 신에게 불경한 것이다. 제사 음식을 내가 훔쳤으니, 어떻게 신이 부여한 숨길과 숨결을 제대로 유지할 수 있겠는가. 먹는 것이 흐뭇함이 아니라 먹지 않는 거기에 흐뭇함이 있다. 짐승을 길들이는 데는 알맞게 굶기고 먹여야 한다. 우리의 몸도 짐승인 만큼 몸이 함부로 욕망을 내고 제멋대로 설치지 않도록 알맞게 절제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오롯한 생각이었다.
류영모를 본받아 일일일식을 시도하는 이가 많았다. 함석헌, 김흥호, 서완근, 박동호는 한끼에 성공했고 염낙준, 주규식, 류자상(아들)은 하루 두끼를 먹었다.
2012년쯤에 절식(節食) 바람이 불었을 때, 류영모의 하루 한끼가 새삼 부각된 적이 있었다. 그의 한끼사상을 읽어낸 게 아니라 그의 한끼의 '과학적 비밀'을 찾아낸 것이라 아이러니하지만, 류영모의 실천이 과학적 이치에도 한 치 틀림이 없음을 입증했다 할 만하다.
일본의 의사인 이시하라 유우미(1948~ )는 '하루 한끼 공복의 힘'이라는 책을 냈다. 나가사키 원폭 병원 혈액과에서 근무했던 그는 공복이 몸의 자연치유력을 높이는 것을 발견했다. 배가 고플 때 백혈구들이 더 활발히 움직여 몸 속의 세균을 잡아먹는다는 것이다.
하루 한끼, 우리 몸에 맞는 최적 식사법
혈액의 오염이 질병의 근원이라는 동양의학의 관점을 받아들인 그는 과식과 운동부족 그리고 스트레스가 혈액 오염을 부른다고 지적했다. 암 질병도 혈액 오염이라고 한다. 특히 과식은 몸에는 익숙하지 않은 것이어서 여분의 영양분을 처리하기 위해 과부하가 걸릴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역시 일본의 의사인 나구모 요시노리(1955~ )의 '1일1식, 52일 공복 프로젝트'도 관심을 끌었다. 그는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한번 들리면 내장 지방이 연소한다는 의미이고, 두번 들리면 외모가 젊어진다는 뜻이며, 세 번 들리면 혈관이 젊어진다는 것이라고 구체적인 효과로 하루 한끼 건강론을 전파했다.
성인병이라 불리는 당뇨·고혈압·위장병·뇌졸중·암은 생활습관 질병이라고도 불리는데, 생활습관 중의 핵심은 식습관이다. 영양을 계속 섭취해야 건강하다는 낡은 생각이 질병을 부른다는 얘기다. 나구모는 10여년간 1일1식을 실천하면서 체험과 의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1일1식이 우리 몸에 맞는 최적의 식사법이라고 주장했다. 한국의 류영모가 이미 80년 전에 실천하고 터득했던 진리를 뒤늦게나마 정리한 셈이다.
100년 되지 않은 비만문명, 류영모의 경고
영국의 노화 연구진은 쥐의 음식물 섭취량을 40% 줄이니 수명이 30% 늘어났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쥐의 수명을 인간의 삶으로 환산하면 20년 정도의 시간이다. 장수 유전자인 시르투인은 '공복'에 작동을 한다. 신이 인간의 수명을 위해 만들어놓은 유전자를 인간이 과식으로 무력화시켜 버린 것이다.
이렇게 된 것도 오래 되지 않았다. 우리가 하루 세끼를 먹은 것은 대개 100년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내장 지방을 저장하는 까닭은 혹독한 추위에서 '지방'을 태워 연소함으로써 체온을 유지할 수 있게 함이었다. 그런데, 추위도 막아버렸고, 지방은 그저 쓸모없이 잔뜩 쌓이게 만들었다. 류영모가 '신의 제사'로 경고한 것이 과학적으로는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 신의 제사를 인간의 탐욕을 위해 거침없이 쓴 결과, 그 후환을 당하는 것이다. 비만으로 인한 질병은 신의 경고라고 할 수 있다.
다석의 건강어록 = 얼음과 술과 담배는 사람이 취할 것이 아니다
어른이고 어린이고 여름에도 얼음을 안 먹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사람의 뱃속에는 얼음이 필요 없다. 얼음을 먹으면 건강을 해친다는 얘기다. 여름에도 부채가 필요 없어야 건강한 것이다. 아이들에게 얼음을 먹이면서 키우는 것은 크게 잘못하는 일이다. 불도 얼음도 다 친구가 아니다. 또한 내 원수도 아니다. 서늘한 것을 물리치려 불에 너무 아첨해서도 못쓰고 또 더운 것을 피하려고 얼음에 너무 아첨해서도 못 쓴다. 과학적으로 잠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모르지만, 나는 고단해서 잔다. 고단한 것은 몸속의 노폐물이 나가지 않아서 그렇다. 현대인이 지나치게 섭취하기 때문에 나갈 게 나가지 못해서 고단하다. 순결한 생활을 하면 고단함이 적다. 밤에 숙면을 하고 나면 몸속의 노폐물이 다 빠져나가 정신이 맑아진다. 사람이 입에는 얼음, 담배, 술은 없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몸 하나 가졌으니 편할 수 없다. 몸 없는데 가서야 무슨 걱정이냐고 노자가 말했다. 그러니 이 몸뚱이가 병이다. 몸이 있어 병이 없는 상태가 소강(小康) 상태다. 감사라면 이걸 감사해야 한다. 몸 성하면 다른 것은 바라지 말라. 몸이 성하면 몸 성하지 않은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 나보다 성하지 않은 사람을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