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 이상국의 알바시네]봉준호의 '아카데미 인베이전'…월드컵 4강신화 넘는 초감격
2020-02-10 17:53
혹자는 2002년 월드컵 4강 감격을 떠오르게 하는 놀라운 쾌거라고 말했다. 기생충의, 기생충에 의한, 기생충을 위한 시상식이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9일(현지시각) 미국 LA에서 열린 제 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국의 영화가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 등 4개의 트로피를 휩쓴 걸 두고 하는 말이다.
작년 5월 제72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할 때부터 '한국최초'라는 수식을 누려온 봉준호 감독 영화 '기생충'은 이제 인류의 기억 속에 담긴 잊을 수 없는 영화가 됐다. 그간 아카데미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외국어 영화 1호라는 92년 역사(1927년 창설)의 신기록을 남겼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물론 작품이 지닌 자체의 매력도 있을 것이고, 미국 아카데미 자체의 변화와 역학도 있을 것이고, 세계의 안목과 문화적 기호의 다양화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고, 인류의 관심사를 건드린 대목도 있을 것이고, 한국의 문화적 기호들에 대한 친근함이 커진 점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우선 외국 언론들이 '기생충'의 아카데미상 수상을 어떻게 예언했는지 들여다 보고 가자.
"기생충은 관객의 상황과 직결된다. 봉준호의 날카로운 사회풍자는 그의 훌륭한 스토리텔링 능력에 버금가는 역할을 해낸다. 영화는 물샐 틈 없는 구조로 이뤄져 있고, 드라마는 속도감 넘치면서도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다. 코미디로 시작해 스릴러로 변모하고 파괴적인 비극으로 끝나는, 톤을 바꾸는 능력 역시 뛰어나다."(가디언 '기생충이 오스카 최우수작품상을 받아야 하는 이유')
"미국인들에게는 낯설 수 있는 한국과 서울을 배경으로 한 영화지만, 인간의 존엄성과 계급과 투쟁을 논한 테마가 전 세계인의 공감을 이끌 만큼 보편적이다. "(워싱턴포스트)
"기생충은 참혹하고 서스펜스 넘치며 재미있고 가슴을 졸이게 만드는 2019년의 영화였다. 한국의 경제적 병폐, 특히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서울에 만연한 부의 불평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1%의 계급이 다른 모든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이 시대에 이런 병폐는 전세계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을 만하다."(베니티 페어, 봉준호-박소담 인터뷰)
"기생충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 세계적인 계급투쟁을 묘사한 시대정신을 품은 영화다. 최우수 작품상의 주인공은 8469명의 아카데미 유권자들이 말하고 싶어하는, 시대정신에 관한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다. 아카데미 후보자들의 오찬에서 가장 큰 박수를 받은 사람은 봉준호 감독이었다."(인디와이어)
이들의 예언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사상 초유의 '수상 사건'을 예측할 수 있었던 까닭은, 기생충이 받을 수 밖에 없었던 5가지 포인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포인트는, 외국 언론들이 잘 지적한 대로 자본주의의 심화로 글로벌 곳곳에서 격화되고 있는 양극화 문제를 독특하고 생생한 표현으로 '적출'해 냈다는 점이다. 전 인류의 문제의식을 독창적으로 '소비'하도록 이끌어낸 작품이었다. 봉준호의 디테일들은 다층적인 그 모두가 연구대상이지만, 여기서 간략히 짚으면 4가지 정도로 정리해볼 수 있다.
(1)빈부의 공간도식화 - 영화는 부자의 공간과 빈자의 공간을 설계하고, 그 공간을 넘나들거나 그 공간에서 기생하는 중간공간을 만들어냈다.
(2)빈부의 위선적 가치관 파괴 - 부자는 악이고 빈자는 선이라는 '성서'적 도식은, 현실 속에서 우리를 심각하게 위선적으로 만들어왔다. 형용사가 꼬이면서 영화는, 관대한 부자와 비열한 빈자로 바꿔놓으면서 관객 욕망의 위치를 캐묻는다.
(3)가난의 생태계 풍자 - 바퀴벌레와 기생충이란 비유를 통해, 그들의 사는 방식을 조롱하면서도 끈덕진 연민의 시선을 놓지 않게 하는 힘을 발휘했다. 위조와 속임수를 통해, 부자의 자양분을 빠는 빈자의 능력은 현실의 생생한 거울로 작동한다.
(4)냄새가 주연이었다 - 어디서든 빈자는 특유의 냄새를 풍기기에 신분이 탄로나는 상황이지만, 그 냄새야 말로 빈자가 지닌 가장 깊은 치욕감 같은 것이다. 선을 침범하는 게 냄새라는 감독의 생각은 영화 속에 '하드코어'에 가까운 굴욕을 숨겨넣었다. 이른 바 '후각적 양극화'다. 지하철 냄새 같은 퀴퀴함에 대해 조롱받았을 때, 기생충은 갑자기 살육을 저지르는 폭도로 뒤바뀐다.
양극화 문제에 대한 이런 치밀한 증언과 고발들은, 인류 관객들을 킬킬거리게 하면서도, 깊은 통증과 은밀하게 욱씬거리는 자의식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이런 보편적인 모순사회의 공감이 이 영화를 반석에 올려놓았을 것이다.
둘째 포인트는 이 수상이 '한국의 수상'이 아니라 봉준호 영화의 수상이라는 점도 짚을 만하다. 한국 영화 전반에 대한 수준 또한 올라가 있는 게 사실이지만, 영화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데에는 감독의 독창적 세계인식과 표현방식들이 공감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유머와 비참이 기이하게 버무려지는 '봉준호 영화어법'은, 무겁고 심각한 주제를 완벽하게 스피디하고 드라마틱하게 끌고 다녔다. 많은 영화 전문가들과 대중들이 공명을 한 것은, 울다가도 웃기고 분노하다가도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장면들, 혹은 혀를 차면서 비웃다가도 어느 새 자기 심장 한쪽이 슬그머니 찔리는 듯한 불쾌감을 느끼게 하는 장면들이 아니었을까. 실컷 조롱하다가 보니 그게 자기 자신이더라는 묘한 뫼비우스의 띠 같은 영화였다.
셋째 포인트는 미국 자체의 양극화 통증이 어떤 방식으로든 작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나라는 한국보다 빈부격차가 훨씬 크다. 2014년 0.47이었던 지니계수는 4년뒤인 2018년 0.485로 올라갔다. 한국은 2015년 기준으로 0.341이다. 영화에서 표현된 것처럼 학업 빈부차도 극심하다. 최근 하버드대에 입학한 백인학생 중의 43%가 동문자녀 우대입학, 교수 자녀, 운동특기자 입학, 기부입학 이었다. 미국 인구의 12%(1천670만명)가 아예 은행계좌를 가지고 있지 않다(2014)는 통계도 있다. 호주, 독일, 프랑스, 영국은 모두 3% 이하인 것과 비교하면 심각성이 느껴진다. 갈수록 두드러지는 이 나라의 양극화는,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도 훨씬 체감적으로 '기생충'에 반응하게 했을 가능성이 크다.
넷째 포인트는 미국이 대선 시즌을 맞은 상황에서 야당인 민주당의 후보들이 저마다 강력하게 제기하고 있는 빈부차 문제가, 아카데미의 정서에도 스며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트럼프대통령의 배타주의적 태도가 미국내에서는 '정치적 올바름'을 지향하는 대중예술인들의 분위기를 낳은 점도 있을 것이다. 아시아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 또한 그런 설명이 가능하다. 또한 미국 대중문화의 양대 시상식으로 아카데미와 그래미가 있는데 둘 다 백 중년 남성 잔치라는 비판이 있어온 것도 사실이다. 이런 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내부 여론이 꿈틀거렸을 수도 있다.
다섯째 포인트는 더도 덜도 아닌, 문화 한류의 약진이다. 지난 11일 연세대에서 열린 'BTS학술토론회'는 유튜브시대의 비틀스로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있는 방탄소년단 현상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대체 글로벌을 뒤흔든 이 그룹의 인기는 무엇이었는가. 팬덤이 메시지를 직접 확산하는 이상한 힘을 지닌 BTS현상. 이 현상을 만들어낸 것은, 이 그룹이 지닌 메시지의 힘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세상을 향한 희망과 사랑을 담은, 보편적이면서도 절실한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표현함으로서, 세계의 공감대와 영향력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이들은 K팝을 주목받는 글로벌 대중문화로 이끌어냈다.
보편적인 성공공식을 벗어난 한류의 독특한 도전은 마침내 인류의 주목을 받는, 시대적 흐름을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다. 음악으로 뒤흔든 세상을, 영화라는 또다른 콘텐츠를 통해 우리 특유의 장점과 메시지들을 내놓을 수 있는 가능성을, 봉준호 감독이 보여준 셈이다. 1960년 비틀스의 미국진출을 '브리티시 인베이전(영국 침공)'이라고 불렀듯이 방탄소년단 현상을 '코리안 인베이전'으로 부르고 있다는 지적을 빌린다면, 이것은 봉준호에 의한 '아카데미 인베이전'이다.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