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국의 파르헤지아] 우한교민 수용시설 아산·진천 번복과 '불신 바이러스'

2020-01-31 10:25

중국 우한에서 온 교민들이 31일 오전 김포공항에 착륙한 전세기에서 내려 버스에 탑승하고 있다. 2020.1.31 [사진 =연합뉴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무기는 공포나 혐오가 아니라 신뢰와 협력입니다." 위협적으로 번지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와 관련해 상호 신뢰를 강조한 건 문재인대통령이었다. 아무리 우수한 방역체계도 신뢰없인 작동하기 어렵다고도 했다. 

중국 우한에서 전세기로 돌아오는 교민들을 격리 수용할 시설 결정에 대한 해당지역 주민이나 국민들의 신뢰 또한 중요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현장을 방문한 관료들이 잇따라 주민들에게 봉변을 당했다. 신뢰를 얻기는 커녕 분노를 진정시키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정부가 이 시설을 물색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4일이었다. 전세기 우한 투입을 논의하면서 국내 수용 대상지를 논의한 것이다. 이때 천안의 공무원 교육시설이 물망에 올랐다. 공항에서 무정차로 2시간 인에 도착할 수 있다는 점, 인근 1시간 내에 이용가능한 종합병원이 있다는 점이 고려됐다. 초기에 전세기 탑승 교민 희망자를 파악한 결과 150명 정도로 예상됐으며 천안 우정공무원교육원은 3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어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27일 전세기에 탈 교민은 694명으로 늘었고, 29일엔 720명까지 늘어났다. 

대상지와 관련해, 외교부가 언론참고용이라며 발표한 것은 지난 28일 오후 4시경이었다. 천안의 우정공무원교육원과 국립중앙청소년수련원 등 2곳에 분산 수용하는 안이었다. 하지만 격리시설 대상지가 천안으로 결정되었다는 사실이 이미 이날 오전 11시쯤에 유출됐고, 해당 지역의 주민들이 격렬하게 반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외교부는 발표 30분 뒤에 이태호 2차관을 통해 "대상지를 아직 정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다음날인 29일 오후 4시30분에 정부는 지난 날 발표 때 언급했던 천안 대신 아산과 진천을 격리시설 대상지라고 발표했다. 아산의 경찰인재개발원과 진천의 국가공무원 인재개발원에 수용하겠다고 했다. 왜 하루만에 '천안'은 쑥 들어가고 '아산'과 '진천'이 등장했을까. 정부의 설명은 엉성하기 짝이 없다. 우한 교민이 상호 격리를 위해 1인1실을 써야 해서 방이 많은 시설이 필요했다고 했지만, 천안의 시설이 아산과 진천의 시설에 비해 규모의 차이가 별로 없다. 아산과 진천의 경우는 주변에 주민이 드문 외딴 지역이라는 것이 고려되었다고 했지만, 진천 인재개발원에서 500m 이내에 800가구가 살고 있어서 이런 해명이 무색해보인다. 공항과의 접근 거리도 고려했다지만, 진천이나 음성은 김포공항과 가까운 곳도 아니다. 

군색한 변명도 등장했다. 대상자 명단의 첫장을 펼쳐보니, 아산과 진천 출신이 몇 명 보였다는 것이다. 우한교민 중에 그 지역 출신자가 있어서 결정을 바꿨다는 건 애당초 말이 되지 않는다. 이런 가운데 아산과 진천의 주민들이 항의 시위에 나선 것은 '님비'로만 비판할 일이 아닌 듯 하다. 대상지 선정과 관련한 문제에서 정부가 제시한 기준이 명쾌하지도 못했고 주민들에게 이해를 구할 수 있는 논리를 구축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대상지를 바꾸는 과정의 석연찮음도 문제이지만, 왜 하필 우리 지역이냐?는 항의에 대해, 국가적인 결정이니 인내하라고만 하는 것은 무책(無策)에 가깝다. 이렇게 일을 처리해가며 어떻게 '신뢰'를 당부할 수 있겠는가. 시설이 좁아서 변경했다면, 천안을 아예 뺀 필요가 있었는지 설명해야 한다. 대상시설이 주민들에게 안전하다고 말을 하면서, 그들을 수도권이 아닌 지역의 '그곳'으로 격리하는 문제에 대해 설득력있는 설명을 하지도 못했다.  이렇게 결정했으니 '지역이기주의'를 내세우지 말고 참으라는 권고 뿐이었다. 

청와대 관계자는 "수용자간 접촉을 최소화하는 측면에서 시설구조와 상황을 고려했을 뿐, 대상지 결정에 정치적 요소는 없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현지 주민들은 우리를 바보로 아느냐고 분통을 터뜨린다. 천안에는 지역구 의원 3명(이규희, 박완주, 윤일규)이 모두 민주당 소속이다. 또 이곳은 민주당 소속인 구본영 시장이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물러난 상태라, 시장 보궐선거도 총선과 함께 치러지는 곳이다. 이곳 주민들이 항의 시위를 벌이는 일은, 4월 총선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민주당에겐 좋지 않은 신호다.

한편 아산과 진천의 격리대상지가 있는 곳은 자유한국당의 이명수(아산갑)과 경대수(증평 진천 음성) 의원 지역구다. 정부의 급박한 선택이 어떤 속내로 진행되었는지를 읽는데는 이것이 훨씬 더 설득력 있는 근거로 보일 수 밖에 없다. 주민들이 천안은 안되고 아산은 되느냐고 행안부 장관을 향해 계란을 던지는 일은, 과격한 행동임에 틀림없지만 그 빌미를 정부가 제공한 것 또한 부정하기 어렵다. 

정책 결정에 있어 공평무사해야할 정부가, 주민들이 거부하는 수용시설을 결정하는데에 총선 변수를 염두에 뒀다는 의심이 나오는 것은 가히 치명적이다. "정치적 요소는 없었다"는 말을 믿게 하려면, 이 미심쩍은 번복 과정에 대해 보다 구체적이고 솔직하게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 가뜩이나 창궐하는 전염병에 예민해진 민심이다. 이럴 때 가세하는 '불신 바이러스'는 더 무섭다. 아무리 우수한 방역체계도 신뢰없인 작동하기 어렵다는 대통령의 그 말씀이 정답이다. 지난 2016년 메르스 사태 대응의 혼선으로 당시 박근혜 정부는 '혼용무도(昏庸無道)'한 권력이란 오명까지 들었다. 어둡고 못나고 법도가 없는 권력은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