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18)사무라이의 아들, 그는 왜 불경죄에 휘말렸는가
2020-02-05 11:24
류영모와 우치무라의 길
우치무라는 1861년생이며, 류영모는 1890년생으로 두 사람은 29살 차이다. 우치무라와 류영모의 생은 일본과 한국의 초기 기독교 시대의 깊은 고뇌를 전형적으로 담고 있다고 할 만하다. 그뿐만 아니라, 두 사람이 살아간 약 30년의 갭은 절묘하게도 서구에 의해 '강제 개방'을 맞는 두 나라의 충격적 경험이 시간차로 진행되는 풍경을 보여주기도 한다.
우치무라가 태어나던 무렵은 외풍이 살벌한 때였다. 미국의 매튜 페리가 태평양을 건너와 일본에 '평화 통상을 하든지 전쟁을 하든지' 양자 택일을 요구한 뒤, 일본 도쿠가와 막부가 두 개의 항구를 개방하고 불평등한 통상조약을 맺은(1858년) 직후였다. 1863년에는 강력한 힘을 지닌 서구를 파악하기 위해 이노우에 가오루나 이토 히로부미가 런던 유학을 떠났던 때다.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일본은 근대적 통일국가로 거듭나며 정치적으로는 입헌주의가 시작되고, 사회문화적으로는 근대화가 시작된다.
류영모가 탄생하기 직전 조선 또한 시끌시끌했다. 서구 열강들이 조선으로 몰려들던 시기로, 영국 함대가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한다며 전라남도의 거문도를 점령하는 사건이 터졌던 무렵이다. 1896년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이 일어난다. 이 사건은 국권이 흔들리던 시대에 외세를 이용해 나라를 지켜보려던 안간힘이었고, 청나라와 일본이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핑계로 들어왔다가 서로 조선의 보호국임을 자임하다가 전쟁을 일으키는 상황까지 발생한다. 이후 일본에 의한 국가 강탈이 진행되면서 식민지 비극까지 이어지는 암흑기를 맞는다.
일본은 서구를 흡수했고, 조선은 외세에 휘말렸다
일본은 서구 열강의 힘과 계획을 빠르게 파악하고 그들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배우고 수용함으로써 국력을 키워나갔지만, 외세의 봇물에 봉착한 조선은 왕권의 수호에 집착하면서 우왕좌왕하던 끝에 국가 내부혁신의 동력을 제대로 이끌어내지 못한 채 일본의 압제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이런 가운데, 양국은 기독교라는 서구의 신앙을 받아들인다. 30년 시차가 있었지만, 우치무라에게나 류영모에게나 '생각의 우주'가 뒤바뀌는 충격이었다.
류영모는 소년시절 서당에서 맹자를 배웠고, YMCA에서 기독교를 접했으며 20대 때 기독교를 전파하는 젊은 교사가 되면서 불경과 도덕경, 톨스토이와 간디의 사상을 섭렵했다. 이런 동·서양 교양과 문화의 퓨전이 그의 내면에서 특유의 통찰력으로 정리되면서 하나의 심오하고 뛰어난 사상체계로 구축되어 갔다.
그보다 30년 전의 일본인 우치무라는 귀족계급이었던 사무라이의 아들로 태어나, 불교와 일본 전통신앙을 믿던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메이지유신은 막부 질서를 해체하면서 사족(士族)이었던 아버지를 몰락시켰다. 우치무라의 부친은 아들에게 바뀐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식으로 '그(서구)들의 언어'를 익히라고 주문했다. 우치무라는 어린 시절 사무라이의 아들로 허리에는 칼을 차고 ABC를 익혔다. 11살 때 처음 영어학교에 들어갔고 이후 도쿄영어학교에 입학하면서 당시 일본 최고의 어학훈련을 받는다.
우치무라가 만난 서양기독교와 영어세상
우치무라가 기독교를 만나는 것은 삿포로 농학교에 진학했을 때였다. 그가 그 학교를 택한 까닭은 소년가장으로서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곳은 전액장학금에 월급도 상당했다. 이 학교에서 그는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 교장을 만나게 된다. 'Boys, Be Ambitious(소년이여 야망을 지녀라)'라는 말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클라크는 정작 미국인들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애머스트대학 재학시절 신앙 부흥운동을 벌였던 인물이었다.
클라크가 세운 삿포로 농학교는 놀라운 곳이었다. 미국의 미개척지 마을을 닮은 한적한 곳에 학교가 있었다. 학교 밖엔 끝없이 산림이 펼쳐져 있었고 밤에는 곰이 나타나 인가를 습격하기도 했다. 그곳은 학교 밖의 세계와는 완전히 단절된 듯했다. 볼 수 있는 건 드넓게 펼쳐진 바다뿐이었다.
학생 우치무라는 서양스타일의 제복 한벌을 받았다. 5m 벽으로 둘러싸인 방에는 학생이 두명씩 기거했다. 서양식 침대와 책상, 스탠드가 놓여 있었다. 작은 난로도 보였다. 의복과 침구는 모두 서양식이었다. 식사는 일본식이었지만 점심은 서양식이었다. 미국 개척지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환경은 클라크가 미국의 문화와 가치관을 함께 이식하기 위해 준비한 세심한 기획이라 할 수 있었다.
농학교 학생들은 영어로 독서하고 외국인 교사와 영어로 대화했다. 끊임없이 외국어만 써야 하는 환경에서 학생들은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생각과 감정을 영어로 표현하는 것이 훨씬 편해지는 상태로 바뀌어 갔다. 이런 가운데 그들은 종교를 만난다. 처음 교실에 들어갔을 때 각자의 책상에는 영어로 된 성서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윤리수업의 교과서이기도 했다.
기독교 서약서를 거부한 우치무라
이 학교에서 우치무라는 종교갈등을 겪는다. 클라크는 학생들에게 '예수를 믿는 자들의 맹약'이라는 서약서를 읽게 하고 서명을 하도록 했다. 이때 우치무라는 7일 가운데 하루를 특별히 신앙을 위해 비워두어야 한다는 의무조항에 대해 반발했고, 외국에서 생겨난 신앙에 들어가는 것은 조국에 대한 배신이며 조국의 종교에 대한 배교 행위라고 주장하며 거부했다.
그는 혼자서 학교 근처의 신사에 가서 "학교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광신을 신속하게 진정시켜 주시고 이국의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신을 배격하는 사람들을 벌해주시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그는 모든 친구들이 서명을 한 뒤 그 고립이 두려워 저항을 버리고 서명하고 만다.
우치무라는 특별한 경험을 한다. 함께 세례를 받은 동기생 7명은 감리교 교회에 입회했으나 이들을 이끌어주는 이는 없었다. 그들은 '7인형제의 작은 교회'를 만든다. 이 작은 교회는 완전히 민주적으로 운영되었고 7인의 회원은 평등했다. 집회를 각자 순번으로 맡았고 주 3회 모임을 가졌다. 7인 중에 당번 한 사람이 목사, 사제, 교사, 사감을 맡았다. 목사가 개회기도를 하고 성서를 낭독하고 짧은 설교를 한다. 목사의 이야기가 끝나면 회원들은 차와 과자를 먹으며 설교에 대한 담화를 나눈다.
이 약식의 작은 교회는 그들을 깊은 형제애로 이끄는 계기가 된다. 이를 삿포로 밴드라고 불렀다. 이들은 선교사들의 지도를 거의 받지 않았다. 식사 전에 감사 기도를 드리는 관습도 1년이 지나서야 알 정도였다. 우치무라가 나중에 '일본 기독교에는 서양식 전통이 필요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이때의 체험에 근거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우치무라의 '두개의 J(Japan과 Jesus)사상'이 정립되는 것도 이때다.
기독교국 미국의 심장으로 들어가다
우치무라는 23세 때인 1884년 기독교국 미국의 '심장'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그들이 이뤄놓은 '성스러운 세계'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싶었다. 필라델피아 교외의 정신박약아 시설에서 경비와 아동도우미 일을 한다. 아이들의 배변을 닦아주면서 그는 "이 일이야말로 나의 도덕적 훈련"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매사추세츠주의 애머스트대학에 들어간다. 독일어를 2년간 배워 괴테의 '파우스트'를 원서로 읽었고,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로 요한복음서를 원문으로 읽었다.
이 학교에서 중대한 경험을 한다. 이혼을 겪으면서 자신의 에고이즘에 대한 자학이 마음속에서 크게 자라났다. 자신의 사명에 대한 회의와 강박이 함께 생기면서 깊은 절망감에 빠진 상황이었다. 이때 애머스트 대학총장인 줄리어스 실리는 이런 말을 했다.
"우치무라, 너는 네 자신의 마음만 들여다보니까 안 되는 거야. 네 밖을 보렴. 십자가에 매달려 네 죄를 용서해준 예수를 왜 바라보지 않는가. 어린 아이가 나무를 화분에 심어놓고 성장을 보려고 매일 그 뿌리를 들어보는 행위를 하고 있는 거라고. 그건 하느님과 햇빛에 맡겨. 안심하고 너의 성장을 기다려 보면 어떻겠는가?"
이때 그는 깊은 회심 체험을 한다. 이 체험을 통해 신 이외에는 어떤 것에도 무릎을 꿇지 않고 오직 신에게만 의지하고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자립하는 인간이 될 수 있는 길을 알게 되었다. 이때의 생각을 발전시켜 "순결하고 단순한 기독교와 장식되고 교리화된 기독교를 엄격하게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가다듬기에 이르렀다.
승려나 유학자가, 일본에게 하느님을 알린 예언자?
우치무라는 미국이나 영국이 자신들의 기독교를 유일한 기독교인 것처럼 일본에 강요하는 것은 정신적인 폭력이며, 일본 기독교는 기독교의 본질을 제외한 그 외의 것에 대해 일본인의 명예와 책임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는 이런 말도 하고 있다.
"모세의 십계명과 부처의 계명들을 비교해본 공정한 재판관이라면 두 종교의 차이가 낮과 밤만큼 현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부처나 공자 그리고 다른 이교도 스승이 가르치는 청렴한 생활을 기독교인들이 자세히 연구해 본다면 부끄러워질지도 모른다. 중국인과 일본인들이 공자가 가르친 것만 제대로 지켜도 기독교 국가보다 더 뛰어난 기독교 국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이 대목은 류영모의 통찰과 닮아 있다. 우치무라는 기독교의 하느님이 불교의 승려나 유교의 유학자들을 예언자로 보내 일본에 신의 섭리를 일깨워줬다는 주장까지 한다.
우치무라는 3년반 만에 일본에 귀국해 니가타의 호쿠에쓰학관 교장으로 부임한다, 그러나 선교사의 원조를 받는 일이 교육의 독립성을 해친다며 원조 거부를 주장하다가 넉달 만에 학관을 나오고 만다. 1889년 2월 11일 메이지 정부는 제국헌법을 발표한다. 그간 논란이 되어온 천황제와 입헌제를 결합한 헌법이었다. 제3조에 '천황은 신성해서 침범할 수 없다'는 조항을 뒀다. 이 헌법은 기독교의 신과 천황이라는 일본적 신의 충돌을 예고하고 있었다.
우치무라의 천황 불경사건
그해 9월 우치무라는 도쿄영어학교의 후신인 제일중고등학교 촉탁교사로 일하게 된다. 취직한 지 얼마 안 된 10월 30일 '교육칙어'가 발표된다. 천황제의 절대화 작업을 교육에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듬해 1월 9일 교육칙어 봉배식(받들어 절하는 행사)이 열렸다. 모든 교사와 학생들은 단상에 올라가 칙어에 명기되어 있는 천황의 사인 앞에 머리를 조아리도록 되어 있었다. 세 번째로 올라갔던 우치무라는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1월 17일자 진보당 계열 신문 '민보'는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종이를 예배하는 것은 기독교주의에 반한다." 이 신문이 인용한 우치무라의 말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우치무라의 '불경(不敬)사건'이다.
우치무라는 일본 내 어디서도 마음 놓고 살 수 없는 국적(國賊·나라의 역적)이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일본 학계에서는 '기독교가 일본에 적합하지 않은 이유'라는 도쿄대 교수의 시론이 등장해 논쟁을 확산시킨다. 기독교는 일본의 국가주의, 충효주의, 현세주의를 담은 교육칙어의 윤리를 벗어나 있다는 주장이었다. 결론은 기독교인 우치무라는 '불경한(不敬漢)'이란 말이었다. 우치무라는 당시 한국 사상계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우치무라의 가장 열성적인 조선인 제자는 김교신이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