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마 왕자이옵니다"에 웃는 후궁들
2019-11-12 17:59
1689년 마침내 숙종은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을 원자(元子·훗날 경종)로 정했다. 그리곤 중전 인현왕후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강등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립(冊立)했다. 이로써 10여 년 이어오던 서인의 권력은 남인에게 넘어갔다. 바로 기사환국(己巳換局)이다.
기사환국의 와중에 인현왕후와 함께 궁에서 쫓겨난 후궁이 있었다. 영빈 김씨(寧嬪 金氏·1669~1735)였다. 그는 당대의 명문가 안동 김씨 출신이었다. 김창국(청음 김상헌의 증손자)의 딸인 그는 1686년 17세에 숙종의 후궁으로 간택(揀擇)되어 궁에 들었다. 당시 남인과 가까웠던 희빈 장씨가 숙종의 총애를 받자 정치적으로 위협을 느낀 서인 계열 안동 김씨가 이를 견제하기 위해 김창국의 딸을 입궁시킨 것이었다. 영빈 김씨는 가문에 힘입어 내명부(內命婦)의 종1품 귀인(貴人)까지 올랐지만, 서인의 권력이 몰락하면서 영빈 김씨도 함께 내쳐진 것이다.
왕위 계승 놓고 생존과 문중 걸린 권력 싸움
5년 뒤인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의 반전이 찾아왔다. 서인이 다시 집권하고 인현왕후 작위가 회복되었으며 왕비였던 장씨는 희빈으로 강등되었다. 영빈 김씨도 귀인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 해 숙종이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와 사이에서 연잉군(훗날 영조)을 낳았다. 그런데 연잉군은 어머니가 미천한 신분이었기에 명문가 출신 영빈 김씨 밑에서 지냈다. 연잉군은 영빈 김씨를 “어머니”라 불렀다.
조선시대 왕비의 임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후계자 생산이었다. 적장자(嫡長子) 승계원칙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국정 운영에 있어서도 가장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27명의 임금 가운데 적장자 출신으로 왕위에 오른 경우는 7명(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후궁이 낳은 아들 또는 방계(傍系) 출신이 왕위에 올랐다는 말이다.
조선 왕실에서 태어난 자녀는 모두 273명. 이 가운데 왕비가 낳은 자녀는 93명, 후궁이 낳은 자녀는 180명이었다. 후궁이 낳은 자녀가 훨씬 많았다. 특히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출산 자체가 급감했으며 헌종 이후엔 왕위 계승자가 아예 태어나지 않아 방계 후손이 왕위를 이어야 했다.
후궁은 출신 성분과 입궁(入宮) 과정에 따라 간택후궁과 승은(承恩)후궁으로 나뉜다. 간택후궁은 왕비가 자녀를 낳지 못할 때 자녀 생산을 목적으로 사대부의 딸을 입궁시킨 경우를 말한다. 간택후궁은 왕비가 승하하면 왕비가 될 수 있다. 남양주에 잠들어 있는 영빈 김씨, 공빈 김씨, 수빈 박씨가 모두 간택후궁이다. 승은후궁은 궁녀가 왕의 자녀를 생산함으로써 품계를 받은 후궁을 말한다. 승은후궁은 왕비가 될 수 없었다.
조선 초기에는 임금 한 명이 평균 7~8명 후궁을 두었다. 그러나 후기로 넘어가면서 평균 3명 정도로 줄었다. 숙종부터 철종까지 왕위를 계승할 후사를 얻기 위해 궁에 들어온 양반가 출신의 간택후궁은 모두 5명이었다. 숙종의 후궁인 영빈 김씨, 정조의 후궁인 원빈 홍씨, 수빈 박씨, 화빈 박씨,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 하지만 이 가운데 왕위 계승자를 생산한 간택후궁은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가 유일하다. 그 정도로 조선 왕실은 왕위 계승을 위한 후계자를 생산하는 데 난항을 겪었다.
조선시대 모든 왕실 여성이 그러했지만, 그 가운데 후궁들은 특히나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다. 늘 긴장의 연속이었고 정치적 외풍(外風)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물론 대다수의 후궁들은 이름 없이 생을 마쳤지만, 기록으로 전해오는 후궁들의 삶은 때론 처절하고 때론 투쟁적이었다.
남양주 진접읍 순강원(順康園)은 인빈 김씨의 무덤이다. 인빈 김씨는 선조의 자식을 가장 많이 낳은 후궁이었다. 모두 4명의 왕자와 5명의 옹주를 낳았다. 인빈 김씨는 광해군 생모인 공빈 김씨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선조는 애초 공빈 김씨를 총애했으나 공빈 김씨가 죽은 뒤 인빈 김씨가 선조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인빈 김씨는 이를 배경으로 권세까지 누리고 정치에 개입했다. 그리고 적절히 활용해 둘째 신성군을 세자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신성군이 의주로 피란을 가다 목숨을 잃으면서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인빈 김씨는 또 광해군과의 관계를 전략적으로 설정해 여러 위기를 넘겼다.
조선후기 간택 후궁 중 후계 생산 한명 뿐
광해군 때인 1613년 인빈 김씨는 59세로 세상을 떠났고 그 후 1623년 셋째아들 정원군의 아들인 능양군이 인조반정을 통해 왕위에 등극했다. 이어 1632년엔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되면서 인빈 김씨는 드디어 왕의 사친(私親)이 되었다. 왕이 되기를 고대했던 아들 신성군이 1592년 숨을 거둔지 30년 만이다.
남양주 진접읍 휘경원(徽慶園)은 수빈 박씨의 무덤이다. 정조는 후사(後嗣)를 잇기 위해 수빈 박씨를 후궁으로 간택했다. 수빈 박씨는 1790년 고대하던 아들을 낳았다. 그 덕분에 수빈 박씨는 정조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정조는 아들 이공을 효의왕후의 아들로 삼아 원자로 정했다.
후궁의 자식이 왕이 된다는 건 정치적 갈등과 투쟁의 불씨가 될 수 있다. 무수히 많았던 피비린내를 수빈 박씨가 모를 리 없었다. 자칫하다간 자신과 아들 모두 다친다는 것을, 친정의 문중이 폐족으로 몰락할 수 있다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수빈 박씨는 현명한 처신으로 그 파란과 풍파를 잘 헤쳐나갔다. “원자(순조)를 낳은 후에도 왕비인 효의왕후를 신중히 섬겼고, 정조 사후에 궁중 어른인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와 혜경궁 홍씨와 왕대비 효의왕후 김씨에게 하루 세 차례 문안 드렸고, 아랫사람을 인자하면서도 위엄 있게 이끌었고, 늘 검소했으며 말이 적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진 현빈이라는 칭송을 들었고 품격 있게 생을 마감했다. 남양주 휘경원에선 수빈 박씨의 절제와 겸양의 미덕을 생각하게 된다.
인빈 김씨와 수빈 박씨의 신위는 현재 서울 청와대 옆 칠궁(七宮)에 모셔져 있다. 칠궁은 조선시대 왕이나 왕으로 추존된 인물을 낳은 후궁 7명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인빈 김씨, 수빈 박씨를 비롯해 희빈 장씨,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 영조 후궁으로 효장세자를 낳은 정빈 이씨, 영조 후궁이자 사도세자 생모인 영빈 이씨, 고종 후궁이자 영친왕 생모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신위를 모셔 놓았다.
대한제국 후궁들은 기록 찾기도 어려워
남양주 홍유릉(洪裕陵) 오른쪽 담장을 끼고 오르는 고즈넉한 길. 조금 올라가면 바로 오른편으로 쇠창살 문이 하나 있다. 개방하는 공간은 아니지만 그 너머로 쭉 들어가면 차례차례 5개의 봉분이 나온다. 모두 대한제국 황실 여성들의 무덤이다. 고종의 후궁이었던 광화당 귀인 이씨(光華堂 貴人 李氏, 1885~1967). 귀인 장씨(貴人 張氏), 삼축당 김씨(三祝堂 金氏, 1890~1970). 광화당 귀인 이씨는 1888년 궁녀가 되었고, 1906년 고종의 후궁이 되었다. 귀인 장씨는 1877년 궁인의 신분일 때 고종의 아들 의친왕을 낳았다. 삼축당 김씨는 1898년 궁녀가 되었고 1911년 고종의 후궁(특별상궁)이 되었으나 자식을 낳지 못했다. 그러나 후궁들에 대한 더 이상의 기록이나 흔적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고종의 아들 의친왕의 첫 번째 후실인 수관당 정씨(修觀堂 鄭氏), 두 번째 후실인 수인당 김씨(修仁堂 金氏)의 무덤도 근처에 있다.
이들의 무덤은 지극히 평범하다. 멸망해가는 제국, 그 황망한 시절에 후궁의 삶을 누가 제대로 돌볼 수 있었을까. 우리조차도 조선시대 후궁들에 비해 대한제국의 후궁들에 대해선 관심이 적은 게 사실이다. 이래저래 왕실 여성 특히 후궁들의 무덤은 찾는 이를 쓸쓸하게 한다. <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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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지원=남양주 시청(시장 조광한)
협찬=MDM 그룹(회장 문주현)
도움말=남양주시립박물관 김형섭 학예사
<참고문헌>
조선의 역사를 지켜온 왕실여성, 신명호 외,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시대 왕실 여성들의 삶, 박주, 국학자료원
조선시대 왕실 여성들의 출산력, 김지영, 정신문화연구 1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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