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거부 이석영, 청산리대첩 산실 만든 무장독립운동 큰 별

2019-11-05 18:41

<10>거부 쏟아 신흥군관학교 세운 이석영 · 황호택(서울시립대) 이광표(서원대) 교수 공동 집필


“학교는 산속에 있었는데 열여덟 개의 교실이 산허리를 따라서 줄지어 있었다. 열여덟부터 서른살까지 100명 가까운 학생들이 새벽 4시에 기상해 총기 훈련을 받고 군사전술을 공부하며 저녁 9시에 취침했다. 게릴라 전술과 한국의 지형을 깊이 공부했고 산을 재빨리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이 중요시되었다. 훈련은 힘들었지만 즐거웠고 봄이면 산이 대단히 아름다웠다 ···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으며 기대로 눈이 빛났다. 자유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인들 못 할쏘냐."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본명 장지락)은 신흥무관학교 시절을 이렇게 가슴 벅찬 서사시로 회상했다.

'무장독립군의 산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조선과 국경을 접한 만주 땅 서간도(西間島) 추가가(鄒家街)에서 중국인의 허름한 옥수수 창고를 빌려 개교식을 가졌다.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아들 6형제 중 둘째인 이석영(李石榮)이 교주(校主)였고 셋째 이철영이 교장이었다. 이석영은 학교 살림만 꾸린 것이 아니라 대소가(大小家)의 식량까지 챙겼다.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서간도 시종기(始終記)에 따르면 자신의 집에 신흥학교 학생 6명이 함께 기거했는데, 양식이 떨어지면 둘째 시숙(석영)이 강냉이 두 자루를 보내주었다고 한다.

 

  전 재산을 쏟아부어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석영의 초상. [우당기념관 제공]


독립전쟁 사상 최대의 전과인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신흥무관학교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1920년 10월 엿새 동안 벌어진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 1200명을 사살하는 승전고를 울렸다. 김좌진의 북로군 정서에는 사관양성소가 있었는데, 신흥무관학교는 김좌진의 요청으로 교관들을 파견해 청산리 대첩의 주역들을 훈련시켰다. 서간도지역의 무장독립군 서로군정서, 만주지역의 대한통의부·정의부·신민부·국민부 같은 무장독립운동 단체에도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참여했다. 의열단 투쟁으로 거듭 일제를 경악하게 한 김원봉을 비롯해 상하이임시정부 산하 광복군 지대장들의 다수가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다.

 이석영 6형제, 가산 정리해 독립운동하러 만주로
 
이유승의 다섯째 아들인 우당 이회영은 1910년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자 신민회 조사단의 일원으로 서간도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해 남만주 일대를 시찰하고 돌아왔다. 이회영은 귀국한 지 얼마 후 형제들과 모임을 가졌다. 6형제는 명문거족의 후예로서 일제의 노예로 사느니 만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자는 합의를 보았다.

이들 6형제가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독립운동을 위해 가족과 노비 40여명을 데리고 만주로 떠난 것은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수많은 권문세가들이 일제로부터 작위와 은사금을 받고 망국을 현실로 받아들이며 친일파가 돼갈 때였다.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 이한철이 그린 이유원의 초상화. 이석영의 생부인 이유승이 초상화의 왼쪽 위에 있는 화상기(畵像記)를 썼다. 그림을 설명한 글이다. [개인 소장]


어떤 일이든 뜻이 아무리 고귀해도 재정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이뤄지기 어렵다. 이회영 형제는 가산을 정리해 40만원을 마련했다. 일제가 눈치채지 못하게 하면서 급하게 처리하느라 시세보다 헐한 값에 팔아야 했다. 1910년에 설립된 민족계 3대 은행(천일·한성·한일)의 납입자본금이 32만5000원이었으니 40만원은 은행 3개를 건립하고도 남을 거금이었다. 당시 쌀 한 섬이 3원 정도였는데 2000년대 쌀값으로 쳐도 600억원은 족히 된다. 신민회에서 갹출하기로 한 자금이 105인 사건으로 막힘에 따라 무장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이석영의 재산 매각 대금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신흥무관학교 청산리·봉오동 전투 주역 길러

석영은 동생 우당 이회영을 신뢰했다. 우당이 아들과 조카 5명을 삭발시켜 신식학교에 입학시키자, 석영은 처음엔 나무랐으나 나중에 우당의 말을 듣고 친구들에게도 자녀를 신식학교에 입교시키라고 권했다(서간도 시종기).

종로구 필운동 배화여고 뒤뜰 큰 바위에 남아 있는 이유원의 암각문. 9대조 이항복의 집터 필운대(弼雲臺)를 방문한 소회를 시로 썼다.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소장유물 정보]


이석영은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귤산(橘山) 이유원(1814~1888)의 양자로 들어가 거부(巨富)를 상속받았다. 귤산은 별장이 있는 가오실(남양주시 화도읍)에서 서울까지 왕래하는 80리길이 모두 자기 밭두렁이라 다른 사람 땅을 밟지 않고 다녔다(황현, 매천야록). 이유원은 별시 문과에 합격한 친자(親子)가 병으로 사망해 그 아들의 양자를 들였으나 과부 며느리와 추문이 생겨 파양(罷養)했다. 그 뒤 이유승의 아들 이석영을 새 양자로 입적했다(윤효정, 풍운한말비사). 이유승과 이유원은 모두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의 후손으로 12촌 집안이었다. 이석영은 1885년 서른 살에 국가적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는 증광시 문과에 합격했다. 급제한 후 수찬(修撰), 승지(承旨), 비서원승(秘書院丞) 같은 직책을 거쳐 종2품까지 올랐다. 이유원이 석영의 자질을 보고 욕심이 나 양자로 빼앗아갔다고 매천야록은 기록했다. 이유원은 막대한 재산이 양자 석영을 통해 신흥무관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쓰임으로써 독립운동사에 이름을 남기게 됐다.

수동면 송천리에 있는 귤산의 수장(壽藏)묘는 서예박물관 같은 분위기가 난다. 수장은 살아 있을 때 미리 만들어 놓은 무덤을 말한다. 묘표는 귤산이 직접 쓴 예서(隷書)체 글씨다. 왕족과 관료들이 많이 살았던 북촌(北村)에서는 귤산의 예서를 당대 최고로 평가했다. 묘비의 후기는 이석영이 썼다. 그의 무덤 위에 있는 조부 이석규의 묘비도 귤산의 글씨다. 이유원의 수장비는 김흥근·김병학·김좌근 등 안동 김씨와 남병철·조두순 등 당대의 권문세가 8명의 글씨를 담고 있어 철종·고종 연간에 부(富)와 권력의 관계를 보여준다.

추사 김정희는 "사람들이 후한(後漢)의 예법(隷法)을 익숙히 보았으나 서경체(西京體)를 터득한 사람은 매우 드물다"며 귤산의 예서를 높이 평가했다. 귤산은 문집 임하필기(林下筆記)에 추사평예(秋史評隷·추사가 예서를 평하다)라는 제목을 달아 이를 소개했다. 그러나 귤산은 임하필기에서 한국 서예의 정통을 기술하면서 김생 양사언 한석봉 윤순 이광사를 거론하고 "윤동철은 동방에서 예서를 쓴 최초의 인물이며 그 이후에는 맥을 이을 자가 없다"고 했다. 예서를 잘 썼던 추사를 빠뜨린 이유가 궁금하다. 귤산은 '씨름도' 같은 그림도 남겼다.
 

      이유원이 예서체로 직접 쓴 자신의 묘표. [사진=김세구 전문위원]


서울대 규장각에 보존돼 있는 '귤산문고 (橘山文稿) 9'에는 수장(壽藏) 공사비 내역이 깨알같이 적혀 있다. 각자공(刻字工) 공임으로 19냥 6전 5푼이 들었다. 총 공사비는 6152냥 6전 3푼이었다. 당시의 화폐단위는 1냥(兩)=10전(錢)=100푼(分)이었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재산도 많지만 이유원은 이렇게 꼼꼼하게 관리를 해서 거부를 수성(守成)한 것이다.

귤산은 안동 김씨 세도가 한창이던 철종 때는 요직을 맡았으나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수원유수로 밀려났다. 그러다 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이 집권하면서 불사조처럼 살아나 영의정에 올랐다. 1875년 세자(순종) 책봉 주청사로 청나라에 갔다온뒤 인천의 개항을 주장했고 1882년 전권대신으로 제물포조약에 조인해 조선의 문호를 열어놓았다. 

천마산 기슭의 보광사는 1000여년의 역사를 지닌 고찰이지만 숱한 전란 속에서 온전하게 유지되지 못했다. 1851년(철종 2년) 귤산이 절을 중건하고 고승 화담경화를 모셔와 자신의 원찰로 삼았다. 절에는 수령 200년으로 추정되는 높이 5m의 반송이 있다. 귤산이 절을 중건할 무렵에 심은 것으로 보인다. 화도읍 가곡리 입구의 '가오복지(嘉梧福地)', 보광사 계곡의 '귤산(橘山)'이라는 암각문(巖刻文)도 그의 작품이다.

천마산 자락의 보광사는 이유원의 원찰이었다. 이 절에 있는 200년 수령의 반송은 이유원이 절을 중건할 무렵에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김세구 전문위원]


석영은 신흥무관학교에 전 재산을 다 쏟아붓고 일제가 만주를 점령하자 톈진, 베이징, 상하이 등을 떠돌며 끼니를 걱정하는 신세가 됐다. 석영은 말년에 병이 들어 막내동생 호영을 따라 국내로 들어왔다가 다시 중국으로 나가 두부 비지로 연명했다. 1934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석영은 두 아들을 두었으나 손이 끊겼다. 큰아들 규준은 밀정들을 처단하는 다물단 단장으로 활동하다가 1927년 일제의 사주를 받은 일당의 함정에 걸려 스좌장(石家庄)에서 행방불명됐다. 차남 규서는 나이가 어려 물정 모르고 행적이 불투명한 사람들과 어울렸던 것 같다. 숙부 우당이 집에 와서 아버지 석영에게 다롄(大連)으로 간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누설한 것이 일제 밀정에게 전달됐다. 우당의 손자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그 바람에 우당이 일경에 체포돼 순국했다. 후에 우당의 동지들이 이들을 몽땅 처단하였다. 그 과정에서 규서와 연배가 비슷한 숙부 규창이 윈망을 듣게 되었다”고 말했다. 1930 년대 상하이에서 죽고 죽이는 혁명상황의 일단면이었다.

2020년 독립전쟁 100주년···국군 뿌리 되새겨야

2020년은 독립전쟁 100 주년을 맞는 해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가 가장 대표적인 독립전쟁이다. 그 전투에 가담한 간부는 대부분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어서 국군의 모태를 신흥무관학교에서 찾아야 한다는 견해가 나온다. 북한은 조선인민군 창건일을 김일성이 안도현(安圖縣)에서 항일무장군사조직을 만든 1932년 4월 25일로 잡고 있다.
 

화도읍 가오실 마을 앞에 서 있는 바위에 이유원이 쓴 '가오복지(嘉梧福地)'라는 암각문이 있다. [사진=김세구 전문위원]


우리도 남북의 정통성 경쟁을 고려한다면 독립전쟁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필요하다. 놀랍게도 우리 국군은 창설 이후 초대 육군참모총장부터 19대까지 일제의 관동군 출신이 맡았다. 국군의 명예를 위해서도 신흥무관학교의 역사에서 뿌리를 찾을 필요가 있다.

남양주시는 홍유릉 앞을 흉물스럽게 가렸던 낡은 예식장을 매입해 이 고장이 배출한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 이석영을 기념하는 광장을 만든다. 남양주시는 예식장 자리에 이석영광장을 조성하고 지하에는 역사체험관을 만들어 2020년 8월 개관한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고종·순종의 황제릉에서 비애와 연민을 느꼈을 관람객들이 이석영 광장을 찾아 잊혀진 역사를 배우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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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지원-남양주시(시장 조광한)
협찬-MDM 그룹(회장 문주현)
도움말=남양주시립박물관 김형섭 학예사


<참고문헌>
1.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서중석, 역사비평사
2.이회영과 젊은 그들, 이덕일, 역사의 아침
3.이석영 선생의 독립투쟁과 고뇌, 허성관, 한가람역사문화연구원
4.서간도 시종기, 이은숙, 일조각
5.19세기 문인 영정의 도상과 양식 -이한철의 <이유원상>을 중심으로-, 박은순, 강좌미술사 24호
6.귤산 이유원의 회인시(懷人詩) 일고, 박종훈, 온지논총 4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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