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 한일전 韓 전승행진...이번엔 '日보복' 위법성이 쟁점

2019-10-10 07:30
공기압밸브 반덤핑 관세 분쟁 등 지금껏 한국이 모두 이겨
日반도체 소재 3품목 수출제한에 '부당한 차별대우' 부각
트럼프 위협 등 WTO 존립 위기...'WTO 제소'에 회의론도

일본의 반도체 소재 3개 품목에 대한 수출규제로 한·일 경제갈등이 불거진 지 지난 4일로 3개월이 지났다. 그 사이 일본은 한국을 수출우대 대상(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했고, 한국도 같은 조치로 맞불을 놨다. 급기야 한국 정부는 지난달 11일 일본을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한다고 밝혔다. 'WTO 한·일전'의 새 막이 오른 셈이다.

일본이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를 정당화하는 명분은 한국이 국제법을 어겼다는 것이다. 일본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과거사 문제가 모두 해결됐다고 주장한다. 이때 개인 피해자들의 청구권도 소멸됐다고 본다. 한국 대법원이 지난해 강제 징용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을 인정하고 배상 판결을 내린 건 협정 위반이자, 국제법 위반이라는 논리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지난 8일 참의원 본회의에서 세코 히로시게 자민당 참의원 간사장이 "국가 간 약속을 어기는 행위를 계속하는" 한국과의 관계를 묻자 "한·일 관계의 근본을 이루는 한·일 청구권협정의 위반 상태를 방치하는 등 신뢰 관계를 해치는 행위를 계속하는 한국에 대해 우선은 국제법에 근거해 국가와 국가 간의 약속을 준수함으로써 한·일 관계를 건전한 관계로 되돌려 놓는 계기를 만들 것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한·일 관계 복원의 책임을 '국제법을 위반한' 한국에 돌린 것이다. 아베 총리에게 이 같은 소신 표명의 기회를 준 세코 간사장은 지난 내각에서 경제산업상으로 일본의 대한국 수출규제를 주도한 이다.

WTO 제소는 한국이 일본의 경제보복을 무력화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다. 일본이 한국의 국제법 위반을 문제 삼아 취한 경제보복의 위법성을 드러내는 게 핵심이다. 세코 간사장이 경제산업상 시절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조치를 '규제'가 아닌 '관리'라고 쓰라고 언론에 압력을 행사한 걸 보면, 일본도 WTO 규칙 위반 혐의를 경계하고 있는 게 분명해 보인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일본의 조치는 WTO 규칙을 위반한 게 아니다”라며 “안전보장상 수출관리를 고쳤을 뿐 직접적으로 수출을 금지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일본이 수출 규제 품목의 한국 수출을 완전히 막지 않고 일부 허가를 내주고 있는 것도 WTO 한·일전에서 방어논리를 펴기 위한 포석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WTO 한·일전 7건··· 사실상 韓 '전승'

WTO 한·일전은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한국과 일본이 지금까지 WTO에서 격돌해 결론이 났거나 다투고 있는 사안은 이번 수출규제까지 모두 7건이다. 일본이 한국을 제소한 게 △일본산 수산물 수입제한 △일본산 공기압 밸브 반덤핑 △일본산 스테인리스 스틸바 반덤핑 △조선 보조금 등 4건이고, 한국이 일본을 문제 삼은 게 △일본 D램 상계관세 △일본 김 수입쿼터 △일본 수출규제 등 3건이다.

통산 전적은 사실상 한국의 전승이었다. 일본이 지난해 6월 자국산 스테인리스 스틸바에 대한 한국의 반덤핑 관세를 문제 삼은 것과 같은 해 11월 한국 정부의 조선업 구조조정 대책이 WTO의 보조금 협정을 위반했다고 주장하며 제소한 건, 이번 수출규제 건은 절차가 진행 중이고, 나머지 4건은 모두 한국이 승전보를 울렸다.

WTO는 지난달 30일 한국이 일본산 공기압 전송용 밸브에 덤핑방지관세를 부과한 조치에 대해 상소기구의 보고서를 최종 채택했다. 이를 두고 한국과 일본이 서로 승소했다고 주장해 논란이 일었지만, WTO가 13개의 쟁점 중 일부 절차적 쟁점을 제외한 10개에 대해 한국의 조치가 협정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판정한 만큼 한국이 '판정승'을 거둔 셈이라는 게 산업통상자원부의 설명이다. 더욱이 일본이 당초 한국 덤핑률 산정방법에 대해 제소하지 않아, 관세율 조정 여부는 애초에 심리대상에서 제외됐다. 한국이 2015년 일본산 공기압 밸브에 대해 향후 5년간 최고 22.77%의 반덤핑 관세를 부과하기로 한 결정에는 이번 판정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얘기다. 결국 한국의 반덤핑 관세 부과를 막지 못한 일본이 일부 방법론적 쟁점의 유리한 판정을 근거로 승소를 주장하는 건 설득력이 없다.

이 밖에 김 분쟁은 한국이 2004년 일본의 김 수입 쿼터제 철폐를 요구하며 WTO에 제소했으나, 일본이 2006년 한국산 김 수입을 대폭 늘리기로 하면서 한국의 제소 취하로 마무리됐다.

D램 분쟁은 일본이 하이닉스의 D램에 27.2%의 상계 관세를 부과하면서 불거졌으나, 2009년 4월 WTO의 최종 판정에서 한국이 승소하면서 일본의 관세 철폐로 종료됐다.

WTO 상소기구는 지난 4월 한국의 후쿠시마 주변산 수산물 수입 금지 조처를 둘러싼 분쟁에서 한국의 손을 들어줬다.
 

 

◆日수출규제 WTO 제소··· 세 가지 쟁점

정부가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를 WTO를 통해 공식적으로 문제 삼으며 '제소장'에 해당하는 양자협의요청서에 적시한 일본의 WTO 협정 의무 주요 위반사항은 크게 세 가지다.

우선 일본이 3개 품목에 대해 한국만을 특정하여 포괄허가에서 개별수출허가로 전환한 것은 WTO의 근본원칙인 차별금지 의무, 특히 최혜국대우 의무 위반이라는 것이다.

수출제한 조치의 설정·유지 금지 의무 위반도 문제 삼았다. 일본 정부가 사실상 자유롭게 교역하던 3개 품목을 각 계약건별로 반드시 개별허가를 받도록 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어떠한 형태의 포괄허가도 금지했다. 이 때문에 한국 기업들은 과거 일본에서 1~2주 안에 조달할 수 있던 품목을 90일까지 소요되는 정부허가 절차를 거쳐 들여와야 하고, 언제든지 거부될 수 있다는 불확실성도 떠안게 됐다.

끝으로 일본의 조치는 정치적인 이유로 교역을 자의적으로 제한하는 것으로서 무역규정을 일관되고,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운영해야 하는 의무에도 저촉된다는 것이다. 

정부는 WTO를 통한 분쟁해결절차의 첫 단계인 양자협의를 공식적으로 요청해 일본이 조속히 이번 조치를 철회하도록 협의할 방침이다. 

양자협의는 WTO 무역분쟁 해결의 첫 단계다. 양자협의에서 60일 안에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WTO에 재판부에 해당하는 패널 설치를 요청하고, 이 패널에서 사안을 검토하게 된다. 통상 패널 결정과 당사국 이행까지 15개월 안팎이 걸린다.

당사국 가운데 한쪽이 판정에 불복해 상소하면 상소기구에서 사안을 다투게 된다. 상소기구는 60~90일 안에 보고서를 내야 하지만, 실제로는 수년이 걸리는 게 보통이다. 후쿠시마 수산물 분쟁도 한국이 최종 역전승을 거두기까지 4년이 걸렸다. 

◆'존립위기' WTO 제소 회의론도 

상황이 이러니 WTO 제소 회의론도 만만치 않다. 특히 일본의 이번 수출규제가 한국 경제의 핵심 부문인 반도체산업을 표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WTO 분쟁이 수년간 이어지는 동안 일본의 수출규제 피해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셈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더욱이 최근에는 WTO의 미래조차 암울해졌다. 블룸버그와 로이터 등 외신들은 최근 WTO가 설립 이후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고 진단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위협과 더불어 각국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단편적인 개혁 요구 등이 빗발치면서 WTO가 존립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에 불공정한 WTO에서 탈퇴할 수 있다고 엄포를 놓은 채 WTO 상소기구 위원(재판관) 지명에 제동을 걸었다.

때문에 '세계 무역 대법원' 격인 WTO 상소기구는 '개점휴업'을 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상소기구는 WTO에 제소된 분쟁사건을 1차로 심리하고 판결하는 패널 사안에 대한 상소를 담당한다. 모두 7명으로 구성되고, 최소 3명이 있어야 결정을 내릴 수 있다. 현재 4명이 공석이고 2명은 오는 12월 10일 임기가 끝난다. 이때까지 트럼프가 고집을 꺾지 않으면 상소기구는 1인 체제로 기능을 잃게 된다. WTO의 분쟁해결절차가 모두 마비되는 셈이다. 호베르토 아제베도 WTO 사무총장은 연쇄적인 무역보복 사태가 뒤따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WTO는 최근 다시 거세진 보호주의와 전자상거래를 비롯한 교역 형태 변화, 기술 발전 등에 따른 개혁을 요구받고 있다. 문제는 각국의 요구를 모두 충족시킬 개혁안을 마련하는 게 쉽지 않다는 점이다. WTO 산파 역할을 한 미국이 등을 돌리면서 구심점도 잃은 상태다.

블룸버그는 WTO가 출범 이후 첫 합의문인 '발리 패키지'를 도출하는 데만 20년이 걸렸다며, 164개 회원국이 새 합의를 이룰 가능성은 적다고 관측했다. WTO의 첫 포괄 합의인 발리 패키지는 2013년 12월 가까스로 모든 회원국의 동의를 구할 수 있었다. WTO가 출범한 1995년 이후 18년 만의 일이다. 이마저도 무역 원활화 등 민감성이 덜한 현안에 대한 합의만 담은 '스몰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