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스럽다'란 표현을 낳은 '멘탈갑' 장관께
2019-09-18 16:56
가을 학기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목계(木鷄)와 ‘1만 시간의 법칙’을 소개했다. 맡은 과목은 ‘현대국가와 거버넌스’이나 수강신청 정정기간이라서 조금은 여유가 있었다. 목계는 나무로 깎아 만든 닭처럼 행동거지를 무겁게 하라는 거고, ‘1만 시간’은 비틀스가 무명시절 1만 시간을 연습해서 정상에 오른 것처럼 여러분도 한 분야에서 성공하려면 최소 1만 시간은 쏟아 부어야 한다는 당부다. 요즘엔 이런 얘기들이 잘 안 먹힌다는 걸 알면서도 산업화시대의 꼰대라 어쩔 수가 없다. 문득 궁금했다. 조국 법무장관이라면 학생들에게 무슨 얘기를 했을까.
조 장관은 ‘청년전태일’이라는 청년시민단체로부터 면담요청을 받고 지난 11일 청사에서 비공개 대담을 했다. 그는 서두에 “합법 불법을 떠나 많은 분들께 실망을 드렸다는 걸 겸허히 인정한다”고 했다. 청년들은 조 장관에게 공정·희망·정의를 상징하는 사다리 모형 3개를 만들어 전달했다. 그들이 딛고 올라갈 공정한 사다리를 만들어달라는 취지라고 했다. 이 대담은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금수저와 흙수저의 대화’라고 지칭한 매체도 있었다.
대담에서 조 장관은 주로 듣기만 했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표적 ‘금수저’라는 그가 하필 이런 상황에서 청년들에게 ‘노력’을 주문하기엔 스스로도 멋쩍었을 터.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용이 될 필요는 없다, 개천에서 붕어, 개구리, 가재로 살아도 된다”고 했던 과거 자신의 발언을 되풀이했을 리도 없다. 그건 청년들의 가슴을 두 번 후벼 파는 꼴이다. 청년들의 좌절 해소도 법무장관의 소관 업무인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놀랍다. 청문회에서 드러난 ‘위선’보다도 이런 행사를 취임 이틀 만에 강행할 수 있는 담대함과 민첩함이 필자를 질리게 한다. 무서운 집요함이다. 아니면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거나.
생각해보라. 조 장관과 그의 가족으로 인해 야기된 논란의 이면엔 한국사회에서 공정(公正)으로서의 정의(正義)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물음이 도사리고 있다. 그 물음에 청년 10여명과의 80분 대담 한 차례로 답을 구할 수 있는가? 청년들과 함께 모형 사다리를 붙잡고 사진을 찍는다고 치워져버린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생기는가. 우리 사회는 좀 더 공정해지는가. 설령 그 청년들이 원했어도 사양했어야 했다. 조 장관의 이런 모습에서 우리는 절망하는 것이다.
그가 사진 찍기에 바빴을 때 서울의 한 외국어고가 ‘금수저 유학반’을 만들어 학생들 간 ‘인턴 품앗이’를 한다는 뉴스가 떴다. 이 유학반 구성은 공정한가, 공정치 않다면 왜 그런가? 유학반 아이들이 유학은 안 가고 전부 SKY로 가기 때문이라고? 그렇다면 유학만 가면 ‘인턴 품앗이’는 얼마든지 해도 되는가.
가수 송가인은 한 종편 TV가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개천에서 건져낸 스타다. 필자는 이런 상상도 해봤다. 트로트 경연이라고는 하나 만약에 송가인이 결선에서 집안 좋고, 학력 좋은, 유명 외국음대 출신의 경쟁자를 만났다 치자. 송가인이 우승하면 그 오디션은 공정하고, 그 유학생이 우승하면 덜 공정한가? 물론 심사의 공정성 여부에 달린 문제겠지만 은연중 약자를 응원하게 되는 이런 마음을 혹 ‘정서적 정의’(emotional justice)라고 할 수도 있을까.
현대 정의론의 대부 존 롤스(1921~2002)는 “한 사회에서의 불평등은 최소 수혜자(사회, 경제적 약자)에게 최대이익이 돌아갈 때에만 허용된다”고 했다. 이른바 ‘차등의 원칙’이다. 롤스는 자유와 평등을 절충해서 불평등에 대한 보편적 해결의 원리를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롤스의 정의론에 따라 평등의 정도가 높은 사회를 더 ‘공정한’ 사회로 오인하는 경향이 있다”는 비판도 있다.(신중섭, <한국에서 공정이란 무엇인가>, 2012년) 한국은 근로자의 40%가 소득세를 한 푼도 내지 않는 나라다. 이건 공정한가?
조 장관 문제는 한국사회의 지속가능성 여부가 걸린, 어렵기 그지없는 공정의 문제와 직결돼 있다. 역대 정권도 하나같이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표방했지만 대개는 실패했다. 이런 난제에 진보정권의 장기인 이벤트로 대응하려든다면 ‘이미지 정치’를 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조 장관이 상급자의 폭언에 극단적 선택을 한 고 김홍영 검사의 묘소를 참배한 것도 마찬가지다. 석동현 전 서울동부지검장은 한 기고문에서 “김 검사의 묘소를 참배하면서 언론에 사진을 노출시키는 ‘조국스러운’ 언론플레이에 다시금 놀라게 된다”고 했다.
그가 숨 돌릴 틈 없이 쏟아내는 일련의 개혁 방안들, 검찰개혁 추진단 구성, 피의사실 공개 금지, 검찰의 직접 수사 축소, 검사와의 대화 등에서도 조급함과 더불어 ‘조국식’ 이벤트 냄새가 물씬 풍긴다. 검찰개혁 같은 묵은 숙제가 이리 서두른다고 하루아침에 풀릴까. 어떤 정책도 국민이 그 선의(善意)를 믿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걸 그가 누구보다 잘 알 터이다.
그는 명망 있는 법학자이고, 여전히 진보의 아이콘이며, 잠재적인 대권 주자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젊어서 무장봉기를 획책한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에 잠시 발을 담그기도 했지만 이 또한 눈감아 줄 수 있다. 사노맹에서 자본주의 정점인 사모펀드에 이르기까지의 삶의 역정은, 비록 석연치 않은 해명에도 불구하고 사유의 폭을 넓혔을 것이고, 균형감과 포용력도 키웠을 것이다. 이런 장점들은 굳이 장관자리가 아니더라도 발휘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진보적 지식인으로서 ‘한국적 정의론’ 모색에 기여하는 편이 훨씬 보람 있지 않았을까. 굳이 “지식인이란 관직에 이르는 먼 길”이라는 조소를 당해야 했나. 문재인 대통령과의 사이에 무슨 말 못할 사연이 있는지는 몰라도 대통령으로서도 최대의 인사 패착이 아닐 수 없다. 적재적소는커녕 한 지식인을 사지(死地)로 몰아넣었다.
조국은 이제 윤석열 검찰에 의해 영어(囹圄)의 몸이 될 수도 있고, 풀려나 넓은 바다로 나아갈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필자는 진짜 조국을 보고 싶다. ‘이미지 정치’로 순간순간을 모면하고, 가벼운 입으로 화를 자초하고, 위선으로 신뢰를 스스로 갉아먹는 그런 조국 말고 진짜 사람 조국 말이다. 필자는 인민재판식 단죄에 결단코 반대한다. 그러나 그를 보면 볼수록 그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강철 같은 멘탈 뒤에서 그는 웃고 있다. 그것이 불안하고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