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 칼럼-지금·여기·당신] 지일-용일-극일의 첫 단추
2019-07-26 17:17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을 가다
지난 7월 4일 "한국에 대한 반도체 핵심소재 수출 규제를 강화하겠다"며 선전포고를 예고한 이후 우리는 일본에 대해 몰랐던 걸 새삼 알게 된다. 일본의 실체를 다시 보고 있다. 지일(知日)이다. 일본에 대해 제대로 공부해야 일본을 더 잘 알게(지일) 되고, 그래야 일본을 더 잘 이용(용일·用日)해 일본을 이기는(극일·克日)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지일-용일-극일, 이 3단계 대일전략은 국가나 기업뿐 아니라 우리 국민 개개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리라. 친일-반일 단순 구도는 낡아도 한참 낡았다. 싸움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내부분열이라는 암세포만 배양할 뿐이다.
이런 차원에서 일본을 안다는 건 일본이 우리에게 저지른 만행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행정안전부 산하 공공기관으로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사장 김용덕)이 있다는 걸 잘 몰랐다. 더욱이 이 재단이 운영하는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이하 역사관)이 부산에 문을 연 지 벌써 4년 됐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됐다.
지난 24일 역사관을 방문하기 위해 KTX를 타고 부산으로 향하며 일제강제동원에 대한 자료를 찾아 읽으면서 나 자신 무지를 탓했다. 재단과 역사관 관계자들을 만나 얘기를 나눌 때도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는 왜 이런 역사를 소홀히 해왔나’는 생각에 내내 불편하고 마음 아팠다.
◆강제동원, 외면받아온 민초의 고난
2015년 12월 문을 연 역사관은 전국 41번째 국립박물관이다. 일제가 자행한 강제동원의 참상을 국민에게 알려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도록 하기 위해 사업비 522억원을 들여 건립했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인력의 22%가량이 경상도 출신이었고, 또 동원된 이들 대부분 부산항에서 눈물의 이별을 했기에 부산에 만들어졌다. 부산 남구 대연동, 세계에서 유일한 UN기념묘지(국가지정문화재) 등이 있는 UN평화문화특구에 자리잡았다.
사실 역사관은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 세우려고 했지만 "독립투사들과 강제동원된 사람들은 다르다"는 항의가 있었다고 한다. 유명 정치인, 고위 인사들이 단 한 번도 찾지 않은 이유 역시 강제동원된 민초들에 대한 왜곡된 인식, 낮은 평가와 맥을 같이한다.
◆멀티미디어로 되살린 아픈 기억
역사관 관람은 어두운 ‘기억의 터널’ 통과로 시작한다. 터널 벽에 위안부, 노동자 등 강제동원된 이들이 걸어가는 애니메이션이 펼쳐지고, 그 위로 15세에 일본 홋카이도(북해도·北海道)로 끌려간 어린 노동자와 악명 높은 일본군 자살특공대(가미카제)에 동원된 고(故) 인재웅씨의 이야기가 낭독된다.
터널을 지나면 강제징용 노동자들의 노무 수첩이 가득 쌓여 있는 박스가 보이고, 일본군으로 끌려가는 아들과 함께 찍은 마지막 가족사진을 본다.
전시물 중 가장 눈길을 끌었던 건 너덜너덜 찢긴 작은 공책이었다. 홋카이도 탄광 노동자로 일한 고(故) 강삼술씨가 적은 ‘북해도 고락가’다. “조선 땅의 우리 집은 저녁밥을 먹건 만은/여기 나의 이내 몸은 수 만길 땅 속에서/주야간을 모르고서 이와 같이 고생인고”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남긴 기록 중 유일한 문학작품, 4·4조 가사체로 적은 노래다.
낡은 일본 군복도 눈에 확 들어온다. 작아도 너무 작았다. 뒷덜미 솜털이 보송보송했을 열대여섯 남자 아이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태평양전쟁 당시 광산의 모습, 열악했던 합숙소를 재현한 세트는 생생했다. 비스듬한 갱도에서 온종일 구부린 채 일해야 했던 모습, 갱도가 무너진 사고 후 발목만 겨우 나와 있는 장면까지 고스란히 재현했다.
강제징용으로 끌려갔던 이들의 육성을 옛날 전화 수화기를 통해 들을 수도 있다. 조선인 7000여 명을 태운 일본 해군 수송선 우키시마호가 1945년 8월 24일 원인 모를 폭발사고로 침몰한 사건에 대한 상세한 자료와 설명도 있다. 3개층에 걸친 한쪽 벽면에는 각종 사진들이 빼곡히 전시돼 있다.
역사관 꼭대기층에 조성된 추모공원, 5.7m 높이 추모탑 맨 위로 새 다섯 마리가 날아 오른다. 일본은 물론 사할린, 남태평양 등 이역만리에서 고향을 그리던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훨훨 나는 새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과거 망각 전쟁의 끝은 죽음 뿐
일제의 강제동원은 모두가 법에 의해 이뤄졌다.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 이후 국민징용령(1939), 여자정신근로령(1944), 학도근로령(1944) 등 모두 15개의 강제동원 법령을 제정, 1945년 8월 패전까지 한반도의 인력과 물자를 총동원했다. 말이 동원이지 강제 수탈이다.
조선인으로 강제동원된 인원은 782만7355명(중복 포함)으로 당시 한반도에 거주했던 인구 3명당 1명꼴(1942년 당시 인구 2636만1401명)이다. 어린이, 노인을 제외한 사실상 조선 민중 전원을 강제동원한 셈이다. 강제 입대한 조선 청년은 20만여명, 한반도와 일본, 점령지 일대에 강제 동원된 노동자들은 755만4764명에 이른다.
일제가 1931년 만주를 침략한 이후 한국, 중국, 대만 등 식민지의 젊은 여성을 일본군이 설치한 위안소에 감금, 성노예를 강요한 만행에는 3만명에서 최대 40만명이 동원된 것으로 파악된다.
미국 철학자 조지 산티아나(1863~1952)는 끔찍했던 1, 2차 세계대전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은 또 그런 상황에 처한다”(Those who cannot remember the past are condemned to repeat it)
하지만 과거를 기억하는 일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민망한 수준이다. 역사관 1년 유물 구입비는 단돈 1000만원. 일본어로 된 탄광용어를 한글로 적은 메모지 한 장도 사지 못한다. 재단과 역사관 예산, 직원 처우 등 다른 얘긴 더 말할 나위도 없을 정도다.
산티아나는 또 이런 명언도 남겼다. “오로지 죽은 자들만이 전쟁의 끝을 본다”(Only the dead have seen the end of war)
지금 눈앞으로 다가온 일본과의 전쟁에 위 두 명언을 합치면 딱 들어맞는다.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이들이 벌이는 전쟁의 끝엔 오로지 죽음만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