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비핵화 동상이몽, 김정은과 문재인의 시간
2019-06-14 08:01
"대북 제재 완화라는 선물 보따리를 기대하며 65시간을 떠들썩하게 달렸는데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을 때 심정은 어땠을까요. 말하자면 '왕의 굴욕'인데, 본인 스스로도 처참하지 않았을까요."
지난 2월 '하노이 회담' 결렬 후 약 100일의 시간이 흘렀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국제 외교무대 데뷔전이었다. 첫 데뷔 무대를 망친 김 위원장에게 이 시간은 어떤 의미였을까. 또 문재인 대통령은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한 대북 전문가는 "왕이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개망신을 당한 건데 아마 극심한 좌절과 수치감, 한편에서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타고 온 열차를 타고 도로 60시간을 달려 북한으로 돌아갔다. 김 위원장의 허탈함과 무력감은 베트남 경제시찰과 중국 일정도 취소한 채 무정차로 내달린 '분노의 질주'로 보였다.
김 위원장은 매우 복잡한 인물이다. 스위스에서 유학하며 민주주의를 접했고, 잘사는 북한을 만들기 위한 야망이 누구보다 강한 '젊은 CEO' 이미지도 갖췄다. 유학 시절 담임 선생님은 김 위원장을 소탈하고 성실하며 유머러스한 청년으로 기억한다.
실제 김 위원장은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지도자다. 특히 영화, 공연, 음악 등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매우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집무실에 놓인 수백권의 책들도 이를 뒷받침한다. 집권 후 수시로 산업현장을 방문해 공장의 낡은 건물과 마구간 같은 위생상태를 지적하고,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질타하는 모습도 전 세대와 달리 거침없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잔인한 지도자'다. 권력을 위해 고모부인 장성택을 처형하고, 이복형인 김정남을 암살했다. 당국 차원의 공개처형과 암매장이 자행되고, 정치박해·종교탄압·굶주림·낙태 등 이유로 인권침해도 빈번하다.
개인사와 역사가 겹치면 좀처럼 정의하기 힘든 인물이 탄생한다. 김정은의 얼굴 중 어느 것이 진짜일까. 우리의 패착은 '독재자', '살인자' 프레임에 갇혀 '인간 김정은'의 진짜 모습을 읽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게 아닐까.
미국과 북한이 제시한 비핵화 골든타임이 몇 개월 남지 않았다. 다가올 한·미 정상회담은 북한의 비핵화 문제를 풀 한국 정부의 중재역을 재검증할 수 있는 분수령이다. 문 대통령이 보낸 시간의 깊이가 국제사회에 평화의 향기를 흩날릴 수 있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