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칼럼] 한국당 경선, 박세일의 ‘선진화’가 답이다
2019-02-20 05:00
자유한국당 당대표 경선을 보면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의 ‘촛불혁명론’이 떠오른다. 백 교수는 촛불혁명을 세 기(期)로 나눈다. 1기는 촛불항쟁 자체이고, 2기는 그 결과로서 진보정권의 창출이며, 3기는 분단극복이다. 그의 말이다. “(1, 2기는 성공했으니) 3기에서 성과를 좀 거둬서 소위 적폐청산도 하고 제도개혁도 하고 헌법도 새로 만들고 여러 가지 관행을 혁신하면 분단체제 극복과정이 거의 궤도에 오르는 거죠.”(‘변화의 시대를 공부하다’, 창비 2018). 진보진영의 원로인 그는 이 정권이 왜 그토록 남북관계에 목을 매는지 이유를 알려준다.
촛불항쟁이 혁명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촛불을 든 사람들이 모두 진보인 것도 아니다. 백 교수가 3기 분단극복 과정에서 해야 할 일로 예시한 ‘시민참여형 통일운동’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늘 그렇듯 진보진영의 대응 역량은 놀랍다. 어떤 사안이든 전체적인 큰 그림 속에서 파악하고 대처한다. 담론의 생산에서 소비까지가 일관되고 체계적이다. 촛불혁명론은 백 교수의 지론인 분단체제론의 연장이다. 한국사회의 모든 왜곡의 근원은 ‘분단’이므로 이를 걷어내는 게 궁극적 목표다. 한국당은 아직도 촛불에 대한 성격 규정조차 못하고 있는데 상대는 벌써 촛불혁명 3기로 치닫고 있다.
그래서일까. 한국당의 경선이 크게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 19일까지 몇 차례의 토론회에서 후보들은 하나같이 “문재인 정권의 실정(失政)”을 공격하고 투쟁을 다짐했지만 필자의 머릿속엔 태극기의 잔상만 남아 있다. 정권을 공격한들 그 모든 게 개혁이라는 시대적 소명에 반하는 지엽말단적인 트집 잡기나 저항으로 치부된다면 무슨 효과가 있을까. 대체 한국당이 그리는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큰 그림이 있기는 한가, 정작 듣고 싶은 건 이에 대한 답이다.
촛불 이후 한국당이 주저앉은 것은 ‘평화’와 ‘포용’이라는 딱 두 단어 때문이다. 평화에 반대해? 그럼 전쟁하자는 거야? 모든 국민을 다 끌어안고 가겠다는 포용에 반대해? 그럼 소수 가진 자들만 잘사는 세상을 원해? 이 단순한 논리에 속수무책 당한 것이다. 2017년 6월 이 정권의 포용국가위원회(위원장 성경륭)가 펴낸 ‘포용국가(Inclusive State)’란 일종의 지침서엔 이런 부제가 붙어 있다. ‘모두를 위한 국가, 약자를 살리는 세상을 위하여’
한국당의 새 대표가 이에 어떻게 대응할지 궁금하다. 필자는 박세일의 선진화와 공동체자유주의에 해답의 실마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2017년 1월, 69세에 유명을 달리한 박세일은 평생을 대한민국의 선진화를 위해 헌신한 학자이자 경세가다. 그가 꿈꾼 선진국은 부민덕국(富民德國). 부유한 국민이 잘사는 덕 있는 국가다. 이를 위해선 개혁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가 손을 잡아야 하고,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가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
박세일은 2006년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이란 저서에서 “자유주의를 통한 개인의 자아실현과 공동체주의를 통한 공동체의 재창조와 발전을 동시에 이루려는 노력이 공동체자유주의의 핵심”이라고 했다. 양자의 결합과 조화는 지난한 과제이나 그 속에 ‘포용’은 이미 들어 있다. 포용은 ‘끌어안는다’는 국가의 시혜적 행위(개입)를 전제로 하고 있지만, 공동체자유주의는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공생과 동행을 상정하고 있다. 그의 말을 빌리면 “자유공동체는 의존(의타)의 문화가 아니라 자립(자조)의 문화 속에서 발전하기 때문”이다. 그가 민주주의의 일탈로서 민중민주주의의 출현을 경계하고, 경제 선진화 방안의 하나로 ‘교육-노동-복지의 삼각 안전망’을 제시한 것도 선각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박세일은 운동권 출신으로 경실련을 만들었고, 김영삼 보수정권에선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으로 세계화 대비 작업을 주도했다. 선진화와 공동체자유주의는 이런 인생역정의 산물이다. 한국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에서 정책위의장까지 지낸 그는 2005년 당의 수도 이전 찬성 방침에 반발해 의원직을 던지고 탈당한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추모집(2018년 1월)에서 그를 “세상이 진정 필요로 하는 온정적 보수주의자”라고 했고, 조선일보 이선민 선임기자는 “진보좌파 지식인들이 질투했던 보수우파의 숨은 신(神)”이라고 썼다. 한국당으로선 실로 소중한 자산이다. ‘다이어트 단식’할 시간에 그의 저서라도 꼭 한 번 읽었으면 한다.
박세일은 2006년 저서에서 “앞으로 15년 내에 선진국이 되지 못하면 한국은 영원히 후진국이 된다”고 예언했다. 그로부터 13년이 흘렀다. 남은 2년, 우리는 선진국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