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우의 미중관계 大분석]③ 중국은 왜 대국이 되고 싶은가
2018-12-05 05:00
아편전쟁 후 '수치의 100년' 겪은 중국, 자존심 회복과 부흥 원해
예부터 중국은 아시아 대륙을 호령한 천하제일의 대국이었다. 세계 문명의 발원지 중 하나라는 사실도 대국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아편전쟁 이전 중국의 국력은 세계 최고였다. 그러나 서구제국의 총포 앞에 맥없이 무너졌고 아시아 최대 국가가 반식민지로 전락하는 비운의 역사가 시작됐다. 반식민지라 함은 주권은 보유했으나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을 말한다. 즉, 청(淸) 조정이 존재했고 주권도 있었으나 서구 제국의 의지와 결정에 따라 중국의 국정을 다스리는 데 국한됐다. 영토의 조차지 할양에서부터 세금 징수, 외국인의 출입부터 치외법권까지 서구열강이 모든 것을 관할하고 청 조정은 이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아편전쟁 이전 중국은 세계 경제의 25~30%를 차지한 경제력 최강국이었으나 청 말기에는 세계 최대의 부채국가가 되었다. 세계 최대 규모의 군사대국이었던 청나라는 열강과의 전쟁에서 연패의 수모를 겪었다. 세계 최대 인구와 영토 면적을 자랑했던 청나라는 최대 빈곤국이 되었고 영토는 열강에게 조차되었다. 중국인은 열강의 부역자가 됐다. 이처럼 중국의 국가적 자존심과 자존감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시간은 반세기(1840년 아편전쟁~1894년 청일전쟁)에 불과했다.
중국을 역사적 수치와 모욕의 수렁에서 구하기 위한 시도는 청 말기에 시작됐다. 의식있는 계몽 인사들은 구국의 최선의 방편이 새로운 국가의 건립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실제로 쑨원(孫文)은 혁명세력을 결집하는 데 성공했고 이들은 공화주의에 입각해 혁명을 통한 공화국 건설에 고군분투한다. 1911년 10월 10일 우창(武昌)에서 첫 봉기에 성공했고 이를 계기로 중국 근현대사에서 성공한 첫 혁명인 신해혁명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듬해 1월 1일 새로운 공화국인 중화민국이 건국됐다. 중국 공산당은 1921년에 창당한다.
그러나 중국의 부흥에 대한 기대감은 얼마 가지 못했다. 공화정의 표본인 정당정치와 의회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때문이다. 중화민국의 여당인 국민당과 야당인 공산당의 정치 협상이 실패하면서 중국은 1927년부터 10년간 치열한 내전까지 치렀다. 1937년 일본의 ‘대동아전쟁’의 발발로 내전은 일시적으로 종결됐고 항일전쟁과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양당 간 협상이 재개됐다.
1946년에 양당이 공존에 합의했으나 국민당은 공산당 척결을 위한 전쟁을 다시 일으켰다. 1949년 국민당의 패배가 확실해지면서 공산당은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다.
중국 공산당은 아편전쟁 이후 건국 이전까지를 ‘수치의 100년’으로 치부한다. 그래서 건국의 모토는 국가적 수치와 모욕에서 조속히 벗어나 중국의 자존심과 부흥을 이루는 것이었다. 즉, 중국이 ‘대국’의 면모를 하루 빨리 되찾는 것이었다.
중국이 꿈꾸던 초기 대국은 경제·정치·외교·군사대국 등으로 순차적이고 전면적이었다. 하지만 계획처럼 순서대로 이루기가 쉽지 않았고 결국 중국에서는 어떤 대국이 되느냐는 중요하지 않게 됐다. 중국의 대내외 정세 변화에 따라 추구하는 대국의 우선순위가 자연스럽게 바뀌게 된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은 우선 나라를 가난에서 구제하는 것이 중국인의 자존감을 회복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마오쩌둥(毛澤東)은 국가 경제력의 회복을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건국 직후인 12월 소련의 지원을 청하러 모스크바로 향했다. 하지만 소련과의 협상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듬해 1월 말에서야 스탈린이 협상을 윤허했고 2월 초 마오쩌둥의 긴급 호출을 받고 달려온 저우언라이(周恩來)가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러시아로부터 3억 달러의 초기 경제발전 차관을 확보한 중국은 경제대국으로 도약하는 꿈을 꿨다. 하지만 그 꿈도 잠시였다. 그 해 6월에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경제발전을 통한 경제대국의 꿈은 유보됐다.
한국전쟁으로 중국의 '대국의 꿈'은 군사대국으로 전환된다. 미국이 수차례 중국에 핵폭격 위협을 가한 때문이다. 한국전쟁 기간에만 세 차례, 1954년의 1차 대만해협 위기사태와 1958년 2차 대만해협 위기사태 발생 당시에도 미국은 핵으로 중국을 위협했다.
핵 노이로제에 걸린 중국 공산당은 1954년에 핵무기 개발을 결의한다. 1955년 이를 최대 국정목표 중 하나로 채택하고 1957년 소련의 핵개발 지원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1959년부터 중·소 갈등이 심화하면서 소련의 지원은 중단됐지만 1964년 10월 중국은 자체적으로 핵개발에 성공한다. 3년 후에는 수소폭탄 실험도 성공했다. 이렇게 중국의 군사대국의 꿈은 무르익어 갔다. 그리고 1975년 전후 중국 핵미사일의 전력화가 거의 완성되면서 명실상부한 군사대국으로 자리매김했다.
중국의 정치대국 꿈은 아시아 공산진영에서 맹주가 되는 것이었다. 중국은 아시아에서만이라도 공산혁명 성공의 선봉에 서고 싶었다. 이에 마오쩌둥은 1950년 전후에 아시아 ‘국제공산당 정보기구(Cominform·코민포름)’ 창설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1953년 스탈린이 죽자 세계 공산진영의 수장 자리까지 넘봤다. 하지만 정치대국의 꿈은 두 가지 이유로 무산됐다. 우선 소련의 공산주의운동 노선이 혁명에서 평화로 전환됐고 소련의 핵개발 지원 확보와 정치대국의 꿈을 맞교환해야 했다.
중국은 국가 이미지 개선을 위해 외교대국으로의 도약도 꿈꿨다. 호전적이고 도발적인 이미지를 바꾸려는 시도는 주권국가로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기 위함이었는데 그래야만 대만이 점유한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의 의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는 유엔의 3분의 2에 달하는 제3세계 국가의 지지를 전제로 한다. 이들과의 연대는 세계질서를 개혁하려는 중국의 전략적 목표와도 부합했다.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던가. 중국의 대국 꿈과 이를 위한 노력은 순서는 무관하나 일관되게 진행됐다. 정치·경제·군사·외교 분야에서의 역량 증대 “투쟁”이 하나씩 성공하면서 대국 반열에 올랐고 대국의 꿈을 향한 중국의 노력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중국은 지난 2010년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됐고 21세기 들어 정치·군사·외교 역량 증강에 집중하고 있다. 또, 소프트 파워 강화를 위한 노력도 배가 중이다. 종합국력 증강을 위한 이러한 중국의 노력은 대국의 꿈을 이루고 이와 동시에 국가적 자존심 회복과 부흥을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