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사덕목(四德目)
2018-06-11 05:00
요가 수트라 I.20
곡예사
인간사회에는 관습과 규범이 있고, 인간에겐 도덕과 윤리라는 기준이 있다. 요가 수련자에게도 그(녀)가 평상시에 지녀야 할 마음가짐의 기준이 있다. 이 마음가짐을 유지하고 실천하는데 도움을 주는 훈련이 요가다.
만일 내가 혹독한 요가훈련을 통해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구부린다 할지라도 이런 마음가짐이 없으면 나는 자신의 겉모습을 남에게 뽐내기를 안달하는 서커스의 곡예사(曲藝師)다.
요가는 몸과 마음의 동시 수련이다. 요가 수련자의 수련 정도는 그의 말하는 태도, 상대방을 보는 친절한 눈빛, 음식을 대하는 몸의 자세, 걸음걸이,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는 방식 등에서 가려진다. 남들 눈에 훌륭한 요가 수련자일지라도 스스로가 자신에게 스승이 돼 수련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가득한 욕심을 걷어내는 수련자가 아니라 욕심을 더욱 강화하는 서커스 단원으로 전락할 수 있다.
덕
요가 수련자는 남에게 덕(德)스럽다. 우리는 ‘덕’을 남에게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이 지니는 성격쯤으로 생각한다. 요가 수련자는 스스로에게 덕스런 사람이다. 친절은 그런 마음가짐의 자연스러운 발현이다. 한자 덕을 보면 그 숨겨진 의미를 감지할 수 있다. 덕은 ‘걷다, 행동하다’를 의미하는 두인변彳과 덕(悳)으로 이루어졌다.
덕은 자연과 인간 그리고 자기 자신의 정신을 집중해 ‘있는 그대로’ 직시(直視)할 수 있는 마음가짐(心)이다. 자기 자신을 직시하는 자는 남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지 않는다. 그의 눈은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돼 있다. 자신을 포장하거나 과장하지 않는다. 자신이 평가한 그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드러날 뿐이다. ’덕이란 그런 자신의 마음가짐을 자신의 몸으로, 자신의 오감으로,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가감 없이 표현하려는 자연스럽고 의연한 행동이다. 어떤 사람이 덕스럽지 못한 이유는 그가 스스로를 직시하지 못하거나 직시하더라도 자신 안에서 발견하는 결점들을 수정할 의지나 노력 없이 방치시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요가 수련자는 자신에게 덕스럽기를 매일 수련하는 자다.
요가 수련자는 현재의 자신을 극복하여 ‘더 나은 자신’이란 선물을 자신에게 주기 위해 끊임없이 연습한다. ‘요가수트라’ 1.19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매 순간 수련해 요가의 목적인 삼매경으로 진입하는 사람이 아니라 특별한 능력이나 전생의 요가수련을 통해 일반 수련자보다 쉽게 삼매경에 도달하는 사람에 관한 구절이다. 그런 사람들은 많지 않다.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김을 매야 가을 추수하고 겨울에 편히 쉰다. 만물의 원칙은 ‘원인과 결과’다. 자신이 노력한 대로 그 혜택을 정확하게 누린다.
설령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런 노력이 화살처럼 빠른 덧없는 삶을 사는 인간에게 가치가 있다. 자신이 노력하지 않았는데 삼매경에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사람에겐 비전, 인내 그리고 투지가 부족하다. 이런 덕목들은 매일 매일 수련을 통해 새로운 경지로 진입하려는 열망을 가진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삼매경 안에서 머무는 시간은 그것을 성취한 요가 수련자의 수련 강도와 시간에 비례한다.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쉽게 삼매경에 진입한 사람이 엄격한 자기 수련이 없다면, 그는 자신이 그 경내 밖에서 헤매고 있는 자신을 곧 발견할 것이다. 그는 마치 요가수련을 자신의 몸과 마음가짐에 익히는 사람이 아니라 일정한 시간에 남에게 뽐내기 위해 수련하는 곡예사와 다름없다.
요가 수트라 I.20
파탄잘리는 ‘요가 수트라’ I.20에서 요가수련자가 훈습(薰習)해야 한 네 가지 덕목을 나열한다. 이 목록이 완벽한 구성은 아니지만 여기서 언급된 단어들은 축자적인 의미를 초월하여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다. 요가 수트라 I.20은 다음과 같다. “슈랏다 비르야 스므리티 사마디-프라즈냐 푸르바카 이타레삼(śraddhā vīrya smr̥ti samādhi-prajñā pūrvaka itareṣām).” 이 문장의 번역은 이렇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 확신, 내면의 힘, 마음 챙김, 그리고 최고의 각성을 통해 깨달음에 도달합니다.” 파탄잘리는 요가 수련자들의 진정한 요가 수련의 목적인 깨달음은 자신의 인격을 다듬고 내면의 힘을 자연스럽게 펼치기 위한 고된 과정의 귀결이라고 주장한다.
그 깨달음은 자신을 뽐내기 위한 자화자찬 문화가 환호하는 우연, 신기한 몸동작, 혹은 갈채가 아니다. 이런 유혹은 누구에게나 있다. 훈련과 연습을 생략하고 요가 수련의 열매를 쉽게 맛보려는 요가 수련자들의 은밀한 욕망일지 모른다. 대한민국처럼 자화자찬의 문화를 찬양하는 사회에서 요가수련이 그런 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많은 사람들이 요가 수련의 길에 들어서서 자신을 혁신하기 위한 단계를 밟지 않고 겉보기에 화려하고 동작을 보여주는 선생들과 환상에 빠져있다.
삼매사덕목
파탄잘리는 네 가지 덕목을 제시한다. 이 덕목들이 엄연하고 정확하다. 요가 수련자가 이 덕목들을 오랫동안 자신의 삶의 일부로 만들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다. 이 덕목들은 피아노 연주의 거장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연주와 같다. 호로비츠가 일생을 수련하고 연습했기 때문에 마침내 그 경지에 도달했다. 덕은 또한 매정하다. 인간이 스스로 그 경지에 도달했다고 안심하는 순간 덕은 그를 매정하게 내쫓는다.
첫 번째 덕목은 ‘슈랏다(śraddhā)’ 즉 ‘자기 확신’이다. 슈랏다는 ‘확신하다’란 의미를 지닌 ‘스랏(srat)’과 ‘우주의 질서에 어울리는 자신이 고유한 임무를 발견하다’란 의미의 ‘다(dhā)’의 합성어다. 자기 확신은 우리가 찾고자 하는 진리는 우리 마음속 안에 숨겨져 있고 요가 수련은 우리가 그 진리를 찾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믿음이다. 슈랏다는 어떤 이념·종교·교리·기관·인물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내딛는 이 한 걸음 한 걸음이 목적지를 향해 있다는 확고한 내적인 느낌이다.
나는 지금 궁극적으로 도착해야 할 그 목적지를 볼 수 없다. 그러나 그곳을 향해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걷고 있으면서도 언젠가는 그곳에 도착할 수 있다는 직관을 갖고 있다. 이 직관은 자신의 지금 여기서 확인된다. 나의 들숨과 날숨 연습은 나의 신체와 정신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 확신은 다른 사람의 반대 주장이나 나의 한 두번 실패에도 불구하고 흔들림이 없다. 세상에서 자기 확신 없이 완성되는 일은 없다. 특히 깨달음을 위한 요가수련의 첫 번째 덕목은 자기 확신이다. 자신을 설득하지 못하고 믿음을 주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없다.
두 번째 덕목은 ‘비르야(vīrya)’다. 이 단어는 번역하기 힘든 단어다. 비르야는 힘·결단·용기, 그리고 어떠한 장애물이나 방해물이라도 극복해 자신이 목적하는 바를 완성하겠다는 굳은 결의(決意)다. 비르야는 올림픽 마라톤선수가 마지막 결승점을 눈앞에 두고 올림픽 경기장에 들어와 달릴 때 생기는 마음이다. 그는 이미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42km를 달렸고 이제 막 사람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마지막 195m를 달려야 한다. 이 순간 그가 필요한 것은 평상시 사용하던 힘이 아니라 초인적인 힘이다. 자신이 결승점에 도달해야겠다는 결기가 바로 비르야다. 요가수련은 바로 이 내공(內攻)을 조금씩 쌓는 과정이다.
세 번째 덕목은 ‘스므르티(smr̥ti)’ 즉 ‘마음 챙김’이다. 스므르티는 흔히 ‘기억’, ‘상기’로 번역된다. 이런 파탄잘리는 스므르티를 일반적인 의미의 기억으로 사용한 것은 아니다. 요가 수련자들은 자신이 오랫동안 수련한 내용을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기억하려고 노력하지 않거나, 그 누구도 기억의 중요성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알게 모르게 실수를 저지른다. 어떤 경우엔 그 실수가 치명적일 수도 있다. 실수의 특징은 반복이며 습관이다. 요가 수련자는 요가 수련의 내용들뿐만 아니라 인생 경험의 원인-과정-결과를 의식적으로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미래에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밤늦게 습관적으로 음식을 먹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는 이 음식을 소화하지 못해 잠을 설치고 아침에 일어나도 개운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어리석은 일을 오랫동안 반복한다. 내가 스스로 마음을 챙겨 밤늦게 음식의 유혹에서 벗어나 스스로 근신하는 행위가 요가다. 요가를 통해 깨달음과 해탈을 얻으려 노력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 24시간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마음을 챙겨 배우고 기억해야 한다. 이 기억만이 나로 하여금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만든다. 기억은 개인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국가 공동체에도 필요한 처방전이다.
네 번째 덕목은 ‘사마디-프라즈냐(amādhi-prajñā)’다. 인간의 의식 가운데 특별한 상태로 자신이 목표에 몰입하고 집중하는 마음이다. 이것을 통해, 자기 확신, 내적인 힘, 그리고 마음 챙김의 덕이 견고하게 만들어진다. 요가 수련자의 목표점과 그것을 이루기 위한 지금 이 시간의 과정은 하나다. 나는 그 점에 도달하고 온전히 나의 일부를 만들기 위해 부산하거나 산만(散漫)하지 않다. 몸과 마음을 한데로 온전히 정성스럽게 모으는 과정을 ‘사마디’ 즉 ‘삼매(三昧)’라고 부른다. 그 고요한 마음의 중심에 참다운 내 자신인 ‘푸루샤(purusha)’가 나를 기다린다. 요가 수련자는 습관적으로 삼매에 안주하여 더욱 더 생기와 여유, 겸허와 패기를 갖춘다. 그는 이 삼매를 황홀경의 상태가 아니라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정신 상태인 ‘각성(覺醒)’을 통해 익힌다. 만일 요가 수련자가 이 네 가지 덕목을 통해 삼매경에 진입한다면, 그는 표면으로 유혹하는 일상에서 내면의 실체를 생생하게 확인하고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자신에게 감동적인 최선을 상태로 유지하며 하루를 지낸다. 요가는 이 네 가지 덕목의 수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