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디지털]히수무레 슴슴한 옥류관 평양냉면, 역사의 테이블에 오르다
2018-04-24 16:21
# 문대통령 제안에, 북이 OK, 정상회담 만찬 메뉴로
남북정상이 만나는 27일 만찬 자리의 특별메뉴는 평양 옥류관 냉면이 나오는 모양이다. 24일 문대통령의 제안을 북한이 흔쾌히 수용했다. 북에서는 지금 옥류관의 요리사와 제면기를 판문점으로 '모셔오는' 작업을 하느라고 부산할 것이다.
옥류관은 57년 역사를 자랑하는 북한의 대표음식점이다. 1961년 광복16주년을 기념해 탄생했다. 대동강 기슭의 옥류교 옆에 지어졌기에 그 이름을 따서 옥류관이 됐다. 그곳 평양냉면은 하루에 1만 그릇이 팔릴만큼 사랑을 받는 메뉴라고 한다.
# 히스무레하고 슴슴한 이것은 무엇인가
평양냉면에 대한 기막한 맛 표현을 한 사람은, 평안북도 정주 출신인 시인 백석(1912-1996)이다. 그의 시 '국수'에선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그것이 평양냉면의 진수다.
메밀가루를 익반죽(뜨거운 물로 반죽하는 것)해서 냉면틀에 눌러 빼내는 압착면인 이 냉면은, 시원함 때문에 여름에도 즐기는 것이지만, 진짜 냉면을 좋아하는 이는 백석의 시 속에서처럼 겨울밤 쩡하니 익은 동치밋국과 함께 좁은 방 아랫목에서 즐겼던 국수이기도 하다. 요란하지 않고 화려하지 않으며 오히려 밋밋해 보여서 처음엔 입맛을 들이기 어렵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평양냉면의 품격있는 심심함 덕이다.
# 입 안에서 현실로 맛보는 통일의 꿈
백석의 시에 나오는 저 표현에 반해 책까지 쓰게된 칼럼니스트 이윤정은 '평냉'의 마니아다. 그녀는 "일단 냉면이 나오면 찬 육수를 벌컥벌컥 들이켜 맛을 본 다음에 고춧가루만 뿌려 먹는다"고, 식객의 한 경지를 슬쩍 일러준다.
"겨울 강추위를 뚫고 냉면집으로 달려가 이 시린 육수를 마시는 소박한 기쁨을 즐긴다"고 밝힌 그녀는, 남한 예술단이 평양 공연 뒤 옥류관에서 식사를 했다는 뉴스를 접하고는 평양냉면의 의미가 '내 입안에서 현실로 맛보는 통일의 꿈'이라고 멋지게 표현해낸다.
평양냉면을 북한사람들은 '피양랭민'이라 부른다. 피양랭민은 물 위에 고요히 떠있는 백조처럼 담담하지만, 그 안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랭민의 국물은 닭고기, 쇠고기, 돼지고기, 꿩고기 등 온갖 고기를 넣어 우려낸 것이며 그 비율이 '인민료리사'의 비밀레시피다. 양지머리 편육과 납작하게 썬 배와 동치미 무, 완숙으로 삶은 달걀 반쪽은 저 담담한 풍경을 돋우는 최소한의 조촐한 들러리다.
# 녹두지짐이와 곁들여야 제맛
그런데 이 랭민이 진짜 맛있는 이유는 직전에 먹는 녹두지짐이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남에서는 녹두지짐이를 빈대떡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엔 돼지갈빗살과 김치, 숙주가 두툼하게 들어간다. 하지만 북한의 녹두지짐이는 종이짝처럼 얇다. 보기엔 부실해보이지만, 식초와 겨자를 섞은 소스에 살짝 찍어 맛을 본 사람들은 녹두가 지닌 고유의 맛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탄복을 내놓게 된다.
지짐이로 입맛을 돋운 뒤 그 위에 얹힌 돼지비계를 한 점 먹고 우물거리며 냉면국물을 들이키면 그야말로 은은하면서 통쾌한 '조선입맛'의 한 경지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이 두 차례 있었던 지난 회담보다 훨씬 기대감이 높아져 있는 것은, 북한의 이례적이고 전향적인 태도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쟁 이후 이 두툼하게 쌓인 분단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을 시기가 다가왔다는 절실한 시대적 인식이 생겨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남과 북의 정상이 한 자리에 앉아 다소 슴슴하고 히스무레한 음식을 앞에 놓고, 아직은 많은 것이 불확실한 한반도의 여러 상황에 대해 담백하고 맛깔스런 결론을 내기를 빈다. 이윤정의 표현처럼, 입맛의 동질감으로 얻는 통일된 정서가 소박하지만 위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같은 국물을 들이키며 미래로 향한 옥류(玉流)의 물꼬를 트는 '랭민의 역사'가 이뤄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