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친일女 1호 배정자③]우범선과 엄비의 줄을 잡아 고종황제에 접근

2018-03-21 11:42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난자 당했을 때 만세를 불렀다?

# 첫사랑 전재식과 5년간 동거생활

'요화 배정자'는 두 차례 영화화되었다. 1966년 이규웅 감독이 만든 첫 영화는 김진규·김지미·허장강이 출연했다. 1973년 정인엽 감독의 '續 요화 배정자'는 신성일과 윤정희·남궁원이 열연했다. 두 영화는 모두 배정자가 진실로 이토를 사랑한 것이 아니며 조선인 의병대장(박진병)이나 독립투사(홍륜)를 은밀히 사모하고 있었다는 스토리를 끼워 넣었다. 배정자를 철저히 매국녀로만 일관해 표현하는 것은 아무리 영화 스토리라도 부담스러웠을까.

이제부터 배분남은 배정자로 부르는 게 맞겠다. 그녀는 이토의 각별한 관심을 얻으면서 창랑각이 아닌 별도의 집에서 따로 기거하며 학교에 다녔다. 1888년 그녀는 밀양부 관기로 있을 때 만났던 첫사랑 전재식을 6년만에 다시 만난다. 일본 유학을 온 그는, 배정자를 찾아왔다.

"네가 정말 계향이냐?"

전재식도 그녀가 일본에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요. 그때 그 계향이에요. 여기에선 사다코라고 불러요. 그러니까 정자."

"아, 정자씨. 내내 당신 생각을 했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인연이 보통은 넘나 보오."

두 사람은 격렬하게 포옹했다. 18세의 배정자는 이 남자와 금방 뜨거워졌다. 둘은 동거에 들어갔다. 전재식은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다녔고 배정자는 경찰학교에 다녔으니 학생커플이었다. 둘 사이에 아들이 생겼다. 전유화(全有華).

전유화는 나중에 조선인 서양의(西洋醫)의 선구자가 된다. 조선총독부 의원의학강습소 제1회 졸업생 27명 중 한 사람인 그는 의학강습소를 졸업한 뒤 1912년 도쿄지케이카이(東京慈惠會) 의학전문학교를 다시 졸업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전유화는 1914년 1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함경북도 경성자혜의원(鏡城慈惠醫院)에서 조수로 근무한 뒤, 인접한 성진(城津)에서 개업했다. 그는 '매국녀의 아들'이라는 고통스런 낙인에 평생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그야 태어난 것 외에 무슨 죄가 있겠는가.

전재식은 배정자와 만난 뒤 5년쯤 된 해에 시름시름 앓다가 숨을 거뒀다.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지 않지만, 이제 막 거대한 매국적 음모의 인생을 시작하는 배정자를 그의 테두리에 넣어두기에는 버거운 운명이 아니었을까. 

# 명성황후 살해 방조범 우범선은 우장춘 박사의 부친

그가 죽은 다음 해인 1894년 배정자는 일본의 김옥균이 국내의 어윤중·김홍집에게 보내는 편지를 품에 넣고 부산항을 향해 출발했다. 그런데 그녀는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다가 체포되고 만다. 김옥균의 경우 당시 정부에서 역적으로 규정한 인물이기에(그 해에 중국에서 피격된 그의 주검은 조선으로 돌아온 뒤 강화도 양화진에서 부관참시를 당했으며 머리는 길거리에 내걸렸다) 배정자는 혹독한 심문을 받는다. 그녀는 이토의 양녀라는 신분을 내세우며 겨우 풀려나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다.

그녀가 돌아간 이듬해인 1895년 궁궐에 침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한 훈련대(친일군인부대) 참령인 우범선(우장춘 박사의 아버지)은 사건이 터진 뒤 일본으로 도망갔다. 을미사변이 일어났을 때 배정자의 심경은 어땠을까?

아버지의 원수이자 인생 파멸의 단초였던 정치세력(명성황후)이 하루아침에 참혹하게 난자당한 사건 앞에서 그녀는 무슨 감정이었을까. 그녀가 살아온 길을 들여다 보면 이날 만세를 불렀다는 세간의 비아냥은 어쩌면 팩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녀에게 아이러니한 일이 일어났다. 국모 시해 방조범 우범선을 죽인 사람과 동지가 된 것이다.

만민공동회 사건과 폭발약 음모사건으로 1899년 7월 일본으로 망명한 전(前) 만민공동회 회장 고영근(高永根·1853~1923)은 명성황후를 살해할 당시 현장에서 방조했던 우범선이 일본에 망명해 있다는 것을 듣고 그를 죽일 결심을 했다. '국모보수(國母報讐·국모의 원수를 갚음)’를 외치는 조선의 여론에 부응함으로써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반전시키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는 우범선이 거주하는 구례시에 집 한 채를 빌렸다. 1903년 11월 24일 집들이를 한다며 우범선을 초청했다. 고영근은 미리 준비한 단도로 우범선의 목과 어깨를 찔렀으며, 고영근의 종자 노원명이 철퇴로 머리를 몇 차례 내리쳤다. 국내에서는 고영근의 행동은 충의에서 나온 것이라는 여론이 비등했고 고종은 그의 죄를 면해줬다. 배정자는 이 무렵 고영근을 알게 됐다. 국모의 원수를 갚은 '충의'의 상징인 된 이 남자는, 배정자를 위하여 신임장을 써준다. 난세의 인생은 이렇게 뒤엉키는가. 그녀는 서울에 부임하던 하야시(林權助) 공사의 통역관으로 조선에 들어왔다. 배정자가 이토에게서 받은 임무는 러시아 세력을 황실에서 몰아내는 일이었다.
 

[tvN에서 방송한 배정자 관련 스토리.]



# 51세 고종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은 33세 세련女

경성에 온 배정자는 순헌황귀비(엄비·?~1911)의 조카사위인 김영진과 이용복을 만났다. 엄비는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비명에 간 뒤 고종의 총애를 입은 궁인 출신으로 1897년 고종의 셋째 아들 이은(李垠)을 낳았다. 1900년 8월에 귀인(貴人)에서 순빈(淳嬪)으로 봉해졌고, 1901년 고종의 계비로 책립되어 엄비라 불리게 되었으며, 1903년 10월에 황귀비로 높아졌다.(엄비는 숙명여학교를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바로 이 무렵에 배정자는 엄비의 줄을 잡고 궁궐로 들어간다. 그녀의 추천으로 고종을 만날 기회까지 얻는다.

나이 33세. 눈부신 미모, 세련된 의상과 매너, 빼어난 일본어 실력에 51세 고종황제는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당시 친러파들은 조선 내에서 러일전쟁이 일어나면 러시아가 승리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쟁을 구실 삼아 고종을 외유의 명목으로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기는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황제 곁에 앉아 말과 자전거를 타는 법에 관해 배정자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을 때 문득 고종이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사랑스럽고 들을 것이 많은 여인이다. 내가 블라디보스토크에 가게 되면 그대를 꼭 데리고 가리다."     이상국 아주T&P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