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의 가상현실 소설⑦]남자현코드(namjahyun code)
2018-03-19 15:56
# 눈물집
“진보면에서 효부상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만...”
“생각하면 쑥스러운 일입니다. 그런 것을 받는 일이 가당키나 한지...청상과부로 아들을 키워온 시어머니는 졸지에 아들을 보내고나서 정신이 그만 이상해지고 말았지요. 근 이십년 동안 망령이 들어 저를 무던히도 괴롭혔지요. ‘내 아들을 잡아먹은 것’이라며 밤마다 달려들어 머리칼을 쥐어뜯을 때마다, 제 마음 속에 숨어있던 죄책감이 떠올라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동춘을 껴안고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동춘아, 언제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느냐. 그렇게 물었지요. 1915년에 돌아가셨으니 짧지 않은 세월이었습니다. 마을사람들은 우리집을 가리켜 ‘눈물집’이라 하였지요. 남편 잃고 망령 시모 모시느라 날마다 흐느낀다 하여 그렇게 붙였다 하더이다. 그 시모상을 당하여 3년간 묘소에 여막을 치고 통곡을 하고 나오니, 진보면에서 상을 주었습니다. 그 상 덕분에 집안이 감시받는 것이 면제되고 살이가 나아졌습니다.”
“저는 어디로 갔습니까?”
조금 질문이 이상하긴 했지만, 그쯤에서 궁금증이 일어 견딜 수 없었다.
“아, 공서. 그분은 항상 제 곁에 있어 주셨지요. 그 또한 영양 전투 이후에 늘 감시받는 사람이었는데, 그래도 불매서원을 지키려고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스승의 남은 제자들을 모아 다시 강의를 시작했지요. 공서는 어느날 밤의 까닭 모를 화재를 겪게 되었는데 이 때 그의 부친과 아내를 잃고 말았습니다. 국오가 간 빈 자리에 공서는 제게 큰 힘이었습니다. 집안의 사사로운 문제를 모두 도와주고, 아이의 교육도 맡아주었습니다. 그일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삶도 많이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 후지와라
“그일이라면?”
“눈물집에서 청상과부로 살고있는 내게, 일본 헌병 하나가 관심을 가졌던가 봅니다. 후지와라라고 했는데... 이 사람이 어느날 밤 집안으로 숨어들었습니다. 며칠 전부터 후지와라가 나를 노린다는 소문을 들은 공서는, 혹시나 하고 집 근처에서 지키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가 담장을 뛰어넘자 공서도 함께 뒤따라 왔습니다. 나는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장도를 꺼내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후지와라는 총을 빼들고 문을 열었습니다. ‘쉿.’ 그는 검지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갖다 대고는 군화를 신은 채 마루를 밟고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공서가 달려들어 총을 나꿔채려고 했습니다. 총은 마루에 떨어졌고 곧 두 사람은 뒤엉켰습니다. 후지와라는 체구가 건장한 사내로, 공서가 감당하기엔 어려운 사람이었지요. 엎치락뒤치락하던 끝에 후지와라가 공서의 멱살을 쥐고 내리누르며 허리춤의 칼을 뽑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때 내가 뛰어내려가 그의 등을 은장도로 깊이 찔렀습니다. 공서는 몸 위에 축 늘어진 후지와라를 제치고 일어섰습니다. 그와 나는 그저 눈만 마주 보며 한참 동안 말없이 서 있었습니다. 한참 후에 죽은 일본인을 업고 걸어나가며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간도로 갈 겁니다. 이름은 개명을 할 것이고... 239라는 비밀번호를 쓸 것이니, 혹시 만나게되는 상황이면 그것으로 연락을 합시다. 건강하시오.’ 이것이 영양에서 그를 본 마지막이었습니다. 후지와라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고, 결국 실종 처리되었던 것으로 압니다.”
괜히 목이 칼칼해져왔다. 그게 정말 나였다면 그 긴박했던 날들의 기억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것인가. 마음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그 뒤에는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힘겹게 어머님을 모시느라, 의지할 곳이 필요해서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세상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요. 교회에 다니면서 일본어도 조금 배웠고, 또 양잠 기술에 대해서도 알게 되어, 영양에서는 처음으로 뽕밭과 누에농사를 시작하기도 하였습니다. 원래 수비교회를 다녔는데, 나중에 목사님이 계동교회를 만드실 때, 내가 발벗고 나섰지요. 1911년쯤의 일이었는데, 당시 교회는 만주 독립운동과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의 남은 제자들은 상당수 만주로 건너갔습니다. 석주 이상룡선생은 부친이 안동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분이고, 일송 김동삼선생은 시댁 쪽의 친척이었기에 연락이 오갔습니다. 하루는 서울의 한 교회를 다니던 한 신도가 고향인 영양에 찾아왔습니다. 그 여인은 3월 첫날에 큰 만세운동이 일어날 것이라는 얘기를 해주었고, 그때 서울에 올라오면 손정도목사를 소개시켜주겠다고 하였습니다.”
# 채찬
“만주로 간 공서는 그뒤 기별이 없었습니까?”
그 말에 남자현은 빙긋이 웃었다. 옆에 서 있던 채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비밀명 239를 쓰는 채찬으로 변신하였지요.”
나는 너무 놀라서 순간적으로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그럼 당신이, 나였던 말이오?”
채찬은 가만히 대답했다.
“불매서원에서 함께 공부했던 최영호와 나는 이름을 각각 김찬, 채찬으로 바꿔 만주에서 활동을 하였습니다. 이후에 많은 동지들이 들어왔지요. 안동에서는 한일합방 후 세 차례에 걸친 만주 대이동이 있었는데, 1피(避)가 1911년 1월 석주(이상룡)선생이 인솔한 대열이었고, 2피는 1912년, 3피는 1913년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떠난 건 3피 때였는데 만주행 기차를 타고가서 단동에서 내려, 다시 그곳에서 마차를 타고 통화현으로 가서 이미 연락을 취해놓고 있던 동지를 만나 활동을 시작하였지요.”
내가 전시대의 나를 만나다니... 그렇다면 이 사람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이 서울에서 활동하는 ‘내’가 둘이란 말인가. 그런 나의 눈빛을 읽기라도 했는지 채찬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 당신을 만난 것이, 내가 할 일의 끝입니다. 이제 더 이상 나타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당신도 나를 보며 놀랐겠지만, 나 또한 당신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살았던 세상으로는 도저히 짐작할 수도 없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아쉽지만 이만 해야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교회를 나왔을 때 채찬은 전처럼 배웅하지 않았다. 문을 닫고난 뒤 문득 다시 열어 안을 보고 싶은 충동이 생겼지만, 참았다. 왠지 그래서는 안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