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의 가상현실 소설③]남자현코드(namjahyun code)

2018-03-13 16:13

 

[사진 = 영화 '암살'의 한 장면.]



# 20대 그녀 남자현

이00? 그건 현재의 내 이름이 아닌가. 누군가가 장난을 치고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 표정을 짓자 채찬은 가만히 말했다.

“세상의 진실은 너무나 정교하여, 가끔 우연의 남발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 법입니다. 선생님은 오래 전 그 이름을 다시 한번 살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로 올 때부터, 많은 일이 정상적이지 않아보였다. 이건 꿈일 수도 있다. 어이없어 보이는 일들도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좀 덤덤해졌다. 그때였다.

“아, 남선생님이 나오십니다.”

낮고 긴박한 채찬의 목소리.

나는 고개를 들어 문이 열리는 안쪽을 보고 있었다.

이십대 중반쯤 되었을까. 눈이 크고 서글서글한 눈매를 지녔고 귀여우면서도 건강해보이는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환하게 웃음을 지으며 다가와 찻상 저쪽에 있는 방석에 가만히 앉는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손을 내민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악수라도 한번 해야죠?”

머쓱한 표정으로 나도 손을 내밀었다. 손매가 통통하고 온기가 느껴진다. 나도 그냥 이의없이 상황을 수용하기로 했다.

“예, 오랜만입니다.”

“그때와 다름없네요. 옷차림과 머리매무새, 그리고 수염이 없어진 것만 빼만 똑같으십니다.”

문득 그녀가 낯익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지금은...학생이신가요?”

“아, 아뇨. 작년에 졸업을 했고...지금은 방송사 취업 준비를 하고 있어요.”

“이름이, 남자현인가요?”

“예. 그래요. 자현이죠.”

“해방전 돌아간 독립운동가 남자현선생은 아시나요?”

그녀는 웃었다.

“그럼요. 저인 걸요. 저는 지금 그분의 스물 네 살로 화현(化現)해있는 셈이죠.”

“아, 왜 하필 스물 네 살로?”

“제겐 스물 네 살이 아주 중요한 때였지요. 1891년 결혼을 했고 5년 뒤인 1896년에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때 나이가 지금 저와 같았던 거죠. 나라가 타이타닉호처럼 침몰하고 있던 무렵, 산골까지 번진 의병전투에서 국오(菊塢)는 아름다운 목숨을 내놓고 말았습니다.”

# 그 남자의 기억

“남편 김영주선생의 호가 국오였군요.”

“예. 의성 김씨로 전서(典書)를 지낸 매은공(梅隱公)의 12대손이었죠. 서릿발을 견디는 국화밭(菊塢)을 사모한 사람이었습니다. 도연명을 좋아했기에 다섯 말의 봉급과 호연(浩然)한 뜻을 어찌 바꾸겠느냐며, 벼슬 하기를 일찌감치 포기했었지요. 저물어가는 국운에 통음하면서도 내게는 항상 희망을 잃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를 잃은 건 큰 충격이었겠군요.”

“그는 저보다 11살이 많아, 제겐 큰 의지가 되었던 분입니다. 워낙 학문에 열심이었는지라, 불매서원(不賣書院)에서 손꼽히는 고제(高弟)였죠. 그 분은 7월 진보 전투에서 돌아갔는데, 얼마 있지 않아 무서리가 내리고 담밑에 소복같이 흰 국화들이 돋아났습니다. 저는 그 국화를 껴안고 흐느끼기도 했습니다.”

“그 말씀 들으니 여기 국화향이 감도는 듯 합니다. 그런데 불매서원은...?”

“아, 아버지가 경영하시던 학원이었지요. 원래 안동에서 열었는데, 그곳에 일본의 압박이 거세지자 영양으로 옮겼습니다. 아버지는 난초가 평생을 추위 속에 지내도, 향기를 파는 법이 없다(蘭一生寒不賣香)는 시에서 ‘불매(不賣)’ 두 글자를 취해, 현판을 걸었습니다. 어려운 시절에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웅변이었죠. 실제로 수회재(守晦齋, 남정한)는 퇴계 이후 영남사림의 기풍을 지킨 일대 양심(良心)이었습니다. 많은 의병운동이 아버지의 휘하에서 전개되었고, 수회의 제자들은 모두 의병이기도 했습니다. 불매서원의 지하에는 의병무기고도 있었습니다.”
 

“수회라는 호는 주자학을 개창한 주희(晦)선생의 뜻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인 듯 합니다.”

“아버지는, 성인의 꿈을 낮에도 밤에도 꾸고 있어야 성인에 가까워진다고 하셨습니다. 성인이란 슈퍼맨이 아니라, 자기에게 성실하고 타인에게 공경을 지닌 마음 바탕을 티없이 실천하는 사람이라고도 말씀하셨지요. 아버지가 주자에 대해 이런 얘기를 해주신 기억이 납니다. ‘그분은 몹시 부지런히 공부하는 사람이셨다. 그가 공자의 뜻을 체계화한 것은, 불교의 화엄사상을 체계를 보고난 다음이었다. 가르침이란 우주와 인간의 이치를 설명하는 큰 틀을 짜는 게 필요하구나. 이렇게 생각하신거지. 그래서 주자는 이치와 현상을 나눠 생각하고 설명하는 이(理)와 기(氣)를 사유하기 시작하셨다네.’ 어린 저는 불매서원 뒷자리에 있던 기둥 뒤에 붙어서서 아버지의 강의를 들었답니다.”
           이상국 아주T&P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