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걸칼럼] 하이닉스 부활에서 GM을 생각한다
2018-02-26 08:24
[윤영걸칼럼]
한국GM 사태를 보면 16년 전 2명이 떠오른다. "청문회에 설 각오로 임하겠다"며 하이닉스 해외매각을 결사반대한 신국환 당시 산업자원부 장관과 고 김대중 대통령의 열린 리더십에 관한 추억이다.
만성 적자회사인 하이닉스는 임기 말로 접어든 김대중 정부의 최대 골칫거리였다. "하이닉스가 망해야 나라가 산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았고, 여의도 증권가는 제2의 대우그룹 사태로 비화될까 가슴을 졸였다. 다급한 대통령과 재정경제부는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에 헐값(4조원·현재 시가총액 56조3000억원)에 팔려고 했다. 게다가 1조5000억원을 저리로 빌려줄 예정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곳에서 반발이 일었다. 2002년 1월 임명된 신국환 산업자원부 장관이었다. 상공관료 출신으로 자유민주연합을 통해 정치에 입문한 그는 이른바 ‘DJP 연합’ 덕분에 입각한 비주류 장관이었다. 그는 취임일성으로 '한국 반도체 산업의 기반이 무너질 것'이라며 하이닉스 해외매각에 극력 반대했다. 신 장관을 향해 “시대에 뒤떨어진 국수주의 정치인”이라는 비난이 따라다녔다. 당시로서는 회생가능성이 없는 기업에 무한정 빨대를 꽂아주자는 주장으로 들렸으니 언론 역시 신 장관에 대해 비난의 화살을 쏘아댔다.
결국 신 장관의 소신이 먹혔다. 질긴 생명력으로 버티던 하이닉스는 2011년 SK그룹에 팔리면서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SK하이닉스는 반도체 슈퍼호황을 타고 지난해 사상 최대인 30조원 매출과 13조7000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SK그룹의 지난해 영업이익 20조원 중 70%가 하이닉스에서 나왔다. 한때 천덕꾸러기 신세에서 이제 한국 수출의 견인차이자 효자 중 효자 기업으로 팔자가 바뀌었다. 만일 외국 컨설팅사와 재정경제부의 말을 들었더라면 지금 우리는 얼마나 가슴을 치고 있을 것인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물론 글로벌 자동차 기업인 GM과 현대전자에서 출발한 토종기업인 하이닉스를 같은 잣대로 비교할 수는 없다. 고용과 연관산업에 미치는 효과 역시 자동차 산업이 압도적이다. 강성노조가 지배하고 있는 한국GM과 하이닉스는 경영여건이 크게 다르다. 그러나 위기는 대응방식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운 기회로 될 수 있다는 면에서 비슷하다.
GM의 전략은 뻔하다. 벼랑 끝 전술로 6월 지방선거를 앞둔 한국 정치권을 최대한 흔들어 잇속을 챙기려는 거다. GM 본사는 영업이익률이 10%에 못 미치는 해외시장은 포기한다는 전략을 짜놓고 가차없이 철수하고 있다. 유럽, 호주, 인도네시아, 태국, 러시아,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생산 중단이나 공장 철수를 단행했다. 군산공장 폐쇄는 이미 돌이킬 수 없고, 부평·창원공장 역시 시기가 문제이지 결국 떠날 가능성이 높다. 최대한 보따리를 챙기고 떠나려는 다국적기업에 대해 ‘먹튀’라고 비난하기에 앞서 냉철하게 대응책을 모색해야 한다.
한국은 전기차의 핵심부품인 배터리와 전기모터는 물론이고 인포테인먼트(정보와 오락 콘텐츠)에서 세계 최강이다. 평창올림픽 덕분에 한국은 자율주행의 핵심인 네트워크 분야에서 5세대(5G)통신망을 세계 최초로 도입할 수 있었다. 정보기술(IT) 인프라도 세계 최첨단이다. GM을 붙들기 위해 쓸 돈이 있다면 정부는 자동차산업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산업구조조정의 종잣돈으로 써야 한다. 첨단 자동차 기술을 도입해서 한국을 새로운 자동차 산업의 메카로 키우겠다는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할 일시적인 실업이나 갈등은 정부가 시장경제와 사회안전망 구축 차원에서 얼마나 슬기롭게 대처하느냐가 관건이다.
같은 외국계 기업인 르노삼성차와 쌍용차는 자동차 생산을 늘리고 신차종 개발을 서두르는 것을 보면 한국GM의 군산공장 폐쇄가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 때문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이르다. 대우그룹이 공중분해되면서 GM에 자동차를 넘겼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섣부른 해외매각으로 한국이 그동안 줄잡아 25조원의 손실을 보았는데도 아직도 GM의 인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한탄했다. ‘언 발 오줌누기식’ 지원에 혈세를 쏟아붓지 말고, 시장원리에 의해 생사가 결정되도록 놓아두어야 한다. 그 다음 경쟁력 있는 한국 기업이 한국GM을 인수해서 운용하는 방안을 추진해볼 일이다.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15명에 달하는 미국, 러시아, 독일 출신 귀화인들이 태극마크를 달고 선전해 신선한 감동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세계는 이처럼 나라 간 벽이 평평해졌다. 경영은 국적 없는 글로벌 무대를 상대로 이루어지지만, 기업과 기업인에게는 엄연히 국가 간 장벽이 있다. 한·미 간 통상마찰도 따지고 보면 동맹국이라도 서로 양보할 수 없는 나라 간 일자리 전쟁이다.
GM 사태가 발등의 불인데 총대를 메고 앞장서는 장수가 보이지 않는다. 컨트롤타워도 없고 부처별로 따로 대응하면서 더 꼬여간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노조를 두둔하고 나서 엇박자를 내고 있다. 정치권은 지방선거에만 온통 눈과 귀가 쏠려 있다. 신국환 장관이 임명되고 독자 생존론이 대두된 2002년에는 그해 말 대통령 선거가 있어 정권 재창출이 시급한 과제였다. 그래도 계파 안배용으로 임명된 장관이 뚝심 있게 밀고 나갔고, 김대중 대통령은 기꺼이 이를 수용했다.
리더의 가장 큰 책무는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는 거다. 기업이 국가를 쇼핑하듯 선택하는 시대를 맞아 산업정책의 큰 틀에서 해결방안을 찾아야 한다. 일자리는 한국 땅에서 만들어진다. GM 사태는 국내 자동차산업을 한 단계 도약시킬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