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기의 그래그래] 오는 사람 가는 사람
2018-01-26 06:00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라고 시인 정현종은 ‘방문객’을 노래했다. 나와 같은 보통의 사람들은 소위 미래파 시인들의 어마어마하게 난해한 시들보다 이렇게 쉬우면서도 울림을 주는 시가 훨씬 좋다. ‘방문객’의 울림은 나이가 좀 지긋할수록 더 크다.
반면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만 듣고 인연을 함부로 맺지 말아라. 알맹이와 쭉정이를 가려서 알맹이에 집중하라’던 법정 스님의 말씀은 평소의 인간관계 관리를 헷갈리게 한다. 어느 구름에 비 들어 있는지 모르고,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사람이 사람을 제대로 보는 눈’을 가지기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천하의 항우도 명장 한신을 몰라봐 창지기로 방치했다가 유방에게 대장군으로 빼앗기는 통에 패자가 되지 않았던가.
항우도 그럴진대,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기 어려워 그저 겪어보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랫동안 겪었기에 많이 믿었던 사람에게 어느 날 벼락 같은 배신과 상처를 받는 일 또한 일상다반사, 한 사람과 인연을 맺고 생의 끝까지 좋은 인연으로 남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 싶다.
살다 보니 이런 인간관계 관리에 가장 영향을 받는 것이 애경사(哀慶事)다. 흔히 ‘경사는 초대를 받지 않았으면 굳이 가지 않아도 되지만 애사는 초대를 받지 않았더라도 가야 할 사람이면 가는 것이 도리’라고들 한다.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 되므로 애사를 더 챙겨서 당사자의 슬픔이 최대한 작아지도록 하라는 뜻으로 읽힌다. 경험상 충분히 일리가 있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턱이 닳아져도 정승이 죽으면 개 한 마리 안 보인다며 시비 걸 생각도 들겠지만, 그건 ‘인연’이 아닌 ‘현실적 이권과 유불리’라 여기와 맥락이 다르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 낳아 키워 대학 졸업시키면 ‘이제 끝났구나’ 싶겠지만 웬걸,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엮여왔던 위아래 지인들의 자녀 혼사와 '천붕(天崩)'이라 일컫는 부모상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줄을 잇는다. 좀 야박할지 모르겠지만 축하객이든 조문객이든 ‘돈’이 들어가는 일이다. 갈지 말지, 봉투에 얼마를 담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은 당연하다. 가난한 사람은 자원은 희소한데 써야 할 곳이 많으니 그렇고, 부자는 ‘돈이 귀하다’는 것을 절감해서 더욱 그렇다. 그나마 가야 할 곳이 가까운 데라면 다행이다. 하루나 이틀을 꼬박 소비해야 할 거리인데 꼭 가야 할 경우에는 애로가 보통이 아니다. 수도권에서 살지만 저 멀리 남해안 섬이 고향인 나는 솔직히 그렇다.
실상이 그렇다면 정반대의 경우는 어떻게 될까? 꼭 가봐야 할 인연을 맺은 사람의 애경사, 특히 애사에 가지 않거나 못 가는 그런 경우 말이다. 피치 못할 사정의 알리바이가 없다면 앞으로 그 둘의 관계는 어찌 될까? 아무렴 이전만 하지는 않을 터. ‘한 사람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가 통째로 날아가는 일’이라 시인이 노래할 것만 같다. 엊그제 아버지와 이별한 고향 친구에게 ‘피치 못 했던’ 사연과 장문의 사과 문자를 보낸 후 착잡한 마음으로 이 글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