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정치 출범기획] 국민 43% “판결 불공정”…법치 근간 ‘흔들’
2018-01-08 16:00
사법제도 신뢰도 27%…OECD 43개국 중 39위
판결 불복해 집단 항의집회·파기 운동 벌이기도
“판결 잣대 객관적이지 않아…소통·설득 중요”
판결 불복해 집단 항의집회·파기 운동 벌이기도
“판결 잣대 객관적이지 않아…소통·설득 중요”
버스요금 2400원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20년 가까이 근무해온 운전기사가 해고됐다. 운전기사 이모씨(54)는 억울하다며 해고무효 소송을 냈고, 1심과 2심의 판단은 각각 ‘해고 부당’과 ‘해고 정당’으로 엇갈렸다. 대법원은 지난해 6월 ‘해고가 정당하다’는 최종 판결을 내렸다. “횡령액이 소액이라 하더라도 운송수입금 횡령행위는 사회 통념상 고용 관계를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책임 있는 사유에 해당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반면 ‘공짜 급여’ 391억여원을 받은 횡령 혐의에 대해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64)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검찰 조사 결과 신 전 부회장은 2008년 4월부터 2015년 10월까지 한국에서 일하지 않으면서 롯데제과 등 계열사 12곳에서 급여 391억여원을 받은 혐의를 받았다. 하지만 법원은 지난해 12월 한국 롯데와 일본 롯데가 사실상 하나의 회사로 운영된 만큼, 신 전 부회장이 한국 경영에도 기여한 바가 있다며 무죄 판결을 내렸다.
대한민국 법치가 흔들리고 있다. 국민의 법 감정과 괴리된 판결에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바닥을 찍고 있다. 재판부의 결정에 항의 집회나 판결 파기 운동을 하는 등 집단 반발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법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더라도 대중의 상식에서 벗어난 판결에 대해 법원이 국민과 소통하면서 설득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 국민 43% “판결 불공정”
‘사법부 불신’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15년 한국법제연구원에서 발간한 ‘2015 국민법의식조사연구’를 보면 만 19세 이상 성인 남녀 3000명 가운데 법원의 공정한 판결에 대해 묻는 말에 '그렇지 않다'는 의견이 43.3%로 '그렇다'는 의견(26%)보다 높게 나타났다.
법에 대한 인상을 물어본 결과, ‘권위적이다’라는 답이 37.6%로 가장 높게 나타났고 그 다음이 ‘불공평하다’(24.4%), ‘민주적이다’(21.3%), ‘공평하다’(14.2%) 순이었다. ‘권위적’이고 ‘불공평’한 법원이 공정한 판결을 내리지 않는다고 국민이 인식한다는 의미다.
지난해 한국행정연구원이 국민 8000명을 대상으로 벌인 ‘사회통합 실태조사’에서도 ‘법원이 공정한 재판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국민은 62.1%로 조사됐다. ‘공정한 재판을 보장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37.9%에 불과했다.
세계적으로도 한국의 사법제도에 대한 신뢰도는 최하위 수준이다. 2015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법제도 신뢰도는 27%로 조사대상 42개국 중 39위에 그쳤다. OECD 회원국 평균 사법제도 신뢰도는 54%로 한국보다 낮은 나라는 콜롬비아(26%), 칠레(19%), 우크라이나(12%) 등 3개국뿐이다.
김도형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부회장은 “국민의 사법부 불신은 본인이 재판 당사자일 경우 ‘억울하다’고 느낀 경험, 그리고 언론에 등장하는 주요 판결을 보고 비롯된 것”이라며 “대표적 예가 최근 법원의 국정농단 피고인들에 대한 구속영장 기각이나 구속적부심 심사 결정, 진경준 전 검사장에 대한 ‘넥슨 공짜 주식’ 무죄 판단”이라고 말했다.
◆ 판결에 항의 집회·파기 운동
사법부 권위가 추락하면서 재판부 판결에 집단 반발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재판부 판단에 항의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판결 파기 촉구 서명운동을 벌이는가 하면, 담당 검사를 직무유기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기도 한다.
지난해 7월 지적장애 여중생을 성매매시키고 나체 영상까지 찍은 혐의로 구속기소 된 10대들이 집행유예로 풀려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자 통영시민단체연대는 기자회견을 열어 해당 판결을 비판했다.
당시 이들은 “1심 형량은 범죄의 형태나 죄질에 비춰 볼 때 피해 학생과 가족이 받아들일 수 없음은 물론이고 국민 법 감정으로도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이라며 가해자 처벌과 더불어 1심 재판에서 거의 다투지 않은 다수의 성 매수자들에 대한 조사와 처벌을 촉구했다.
동물자유연대 등 동물보호단체는 같은 해 8월 개 30마리를 전기가 흐르는 쇠꼬챙이로 도살해 학대한 혐의로 기소된 농장주가 무죄 선고를 받은 것에 대해 무죄 파기 촉구 서명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이후 “담당 검사가 재판 과정에서 원심판결을 뒤집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며 담당 검사를 직무유기 혐의로 경찰에 고발하기도 했다.
앞서 같은 해 4월엔 법원이 출산 중 태아 사망 사고에 대해 담당 의사에게 금고형을 선고하자 대한의사협회가 부당하다며 반발, 서울역에서 ‘전국 산부인과 의사 긴급 궐기대회’를 열고 8000여명의 탄원서를 받아 법원에 제출했다.
◆ ‘사법평의회’ 윗선 입김 줄일까
문재인 정부는 사법부 신뢰 회복 방안으로 ‘사법평의회’ 도입안을 내놨다. 현재의 사법 체제는 대법원장이 법관 인사와 징계, 법원 예산 등 사법 행정 전반을 결정하기 때문에 일선 법관들이 판결을 내릴 때 윗선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사법평의회 제도는 대법원장 대신 사법평의회가 사법 행정 전반을 운영하자는 방안이다.
문제는 인원 구성이다. 지난해 7월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 자문위원회의 최종 보고서에 따르면 사법평의회는 국회에서 선출하는 위원 8명과 대통령이 지명하는 2명, 법관 회의가 선출하는 6명 등 총 16명으로 구성된다. 사법부의 정치화를 우려할 수 있는 대목이다. 김명수 대법원장도 지난해 10월 기자간담회에서 “사법평의회는 정치적이고 법원의 독립성을 크게 훼손할 수 있다”며 반대 의견을 분명히 밝혔다.
전문가들은 제도 개선과 더불어 법원 스스로 실제 판결과 국민 법 감정 사이 괴리를 줄이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도형 민변 부회장은 “국민이 법원의 판단이 오락가락한다고 느끼는 것은 그 잣대가 객관적이지 않기 때문”이라면서 “모든 형량을 일률적으로 규정할 순 없겠지만, 법원이 국민 법 감정과 괴리가 있는 사안에 대해선 국민과 소통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재판 당사자들이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대부분 사건은 ‘5분 재판’이라 할 정도로 간단히 넘어간다”며 “한국은 인구 대비 법관 숫자가 유럽의 3분의1 수준밖에 안 되기 때문에 법관 수를 2배 정도 늘리는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전관예우 문제에 대해선 “과거보다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검증되지 않은 부분, 예를 들어 ‘상대방 없는 재판’인 가처분 사건 같은 경우 전관예우가 작용하기도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