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욱의 음악이야기] 만쥬한봉지, 낭만적 리얼리즘에 도전하다

2017-12-13 06:00

[사진=정병욱 대중음악평론가·한국대중음악상선정위원]


오늘날 우리는 '음악에서 무엇을 들을 수 있을까?'라는 목적의식이 새삼스러운 시대에 살고 있다. 사적 공간에서의 음악감상은 많은 사람에게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배경음악이 된 지 오래이며, 공연이나 콘서트 관람은 콘텐츠 자체에 대한 소비이기보다 가수나 해당 신(scene)에 대한 맹목적인 소비로 더 익숙하다. 그러나 지난 11월 29일 발매된 만쥬한봉지의 정규 2집 '수연'은 이 같은 현실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형식이다. '귀로 듣는 뮤지컬'을 지향했다는 이 앨범은 전체가 하나의 스토리로 구성되어 내용과 감상 모두 순차적이고 서사적인 구조를 띤다. 앨범의 제목부터가 이야기의 주인공 이름인 '김수연'에서 따왔으며, 수연을 소개하는 '안녕 나는 수연이'부터 일련의 사건 후 미래를 향하는 보너스 트랙 '너와 나의 시작'까지 시종일관 기획 의도와 콘셉트를 준수해 마치 한 편의 소설을 독파하는 듯한 감상을 전한다.

물론 실제 오디오북이나 뮤지컬 형식을 기대할 수는 없다. 수연의 심정을 대변하는 노래들 사이로 줄거리 흐름을 개괄하는 내레이션이 짧게 삽입되어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만쥬한봉지가 앨범 스토리를 보강한 실제 뮤지컬 제작을 추후 바란다고 밝혔듯, 현 시점의 '수연'은 외형적 시도를 수단으로 가미한 엄연한 음악 앨범이다.

이는 만쥬한봉지가 음악에 있어서도 그 정체성을 결코 놓지 않고 발전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 가능하다. 이들의 음악은 '어쿠스틱 뽕짝소울'이라는 별난 조어로 설명되어 왔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이름은 이들의 음악 총체에 대한 종합적 정의이기보다 어쿠스틱, 뽕짝, 소울이라는 갖가지 속성을 적재적소에 차용해 규정이 불가능한 이들의 음악을 설명하는 물리적 집합에 가까웠다. 곧 그러한 수식어는 뽕끼라는 토속적 스타일, 스윙과 그루브라는 외래의 양식, 어쿠스틱 사운드라는 친숙한 방식을 일관되게 조합해온 이들 음악에 대한 적확한 대변이었다.

'수연'에서도 마찬가지다. 서울재즈아카데미를 거친 최용수의 송라이팅 덕분인지 지난 앨범 '무소유 블루스'(2015)를 연상시키는 '골목길'의 블루스 인용이나 트랙리스트 곳곳에서 발견되는 블랙뮤직 특유의 리듬감이 넘실대며 살아 있다. 바다 건너 끈적한 외래 감수성을 우리에게 친숙한 뽕끼와 밴드만의 뚜렷한 개성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트랙마다 다양하게 변하는 노래의 정서를 풍성하고도 과잉 없이 연기하는 보컬 만쥬의 힘이다.

건반 류평강의 반주는 더 이상 어쿠스틱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지 않을 만큼 디지털 신스사운드를 다채롭게 활용하며 전반적인 농도를 조절한다. 대금·소금·피리 같은 국악기, 현악 스트링 피처링 등이 등장하면서도 이들이 결코 노래에 앞서거나 앨범의 서사를 해치지 않는 것은 여러 시도를 거치면서도 나름의 조합을 꾸준히 지켜온 만쥬한봉지만의 색과 멤버 간 조화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수연'에 본격적으로 몰입하며 마주하는 도전은 내용적 측면이다. 이번 앨범 이전에도 일상에 긴밀하게 맞닿은 공감 가는 가사를 목표로 작업해 왔던 만쥬한봉지는 2집에서도 작금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인 여성과 청춘의 삶을 전면에 내세운다. 현대를 살아가는 29세 평범한 여성의 오늘을 모노드라마 형식으로 전달함으로써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82년생 김지영'을 연상시킨다. 아울러 디지털 싱글 단위로 소비되는 음악 산업 외연에 대한 비판만이 아닌 현실에 대한 주체적 의식을 드러내 예술활동의 본질적 이유에 접근한다. 물론 동시대의 민감하고 아픈 이야기로서 객관적 거리를 확보하기는 한다. 문제의식을 나열하고 혁명적 주제의식을 관철하기보다 주인공의 삶과 감정을 관찰하는 데 주안점을 두는 것이다.

사실 '수연'은 현실적이지만 동시에 비현실적이다. "억울해서 이대로는 안 되겠어. 복수하자." 내레이션 이후 일련의 복수과정과 김수연이 오랫동안 꿔왔던 꿈에 한 걸음 다가서는 결말은 현실에서 쉽게 성취하기 힘든 낭만이다. 그러나 이는 '수연'이 외적으로나 의미적으로 뮤지컬 형식을 취하고 있는 사실과 다시 연결된다.

차분하고 담담한 내레이션의 어조가 들려주는 어찌할 도리 없는 막막한 현실이 앨범의 핵심이 아니다. 이와 교차해 등장하는 뮤지컬의 낙천주의적이고 낭만적인 태도, 하나의 앨범을 통째로 청취하게 하는 과정 등을 통해 수연이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가상의 희망 그리고 듣는 이의 정서적 카타르시스를 동일시하는 것이 이 앨범의 성취이자 도전이다.